53. 방주의 새
본문말씀 : 창세기 8장 6~19절
사십 일을 지나서 노아가 그 방주에 지은 창을 열고 까마귀를 내어 놓으매 까마귀가 물이 땅에서 마르기까지 날아 왕래하였더라 그가 또 비둘기를 내어 놓아 지면에 물이 감한 여부를 알고자 하매 온 지면에 물이 있으므로 비둘기가 접족할 곳을 찾지 못하고 방주로 돌아와 그에게로 오는지라 그가 손을 내밀어 방주 속 자기에게로 받아들이고 또 칠 일을 기다려 다시 비둘기를 방주에서 내어 놓으매 저녁때에 비둘기가 그에게로 돌아왔는데 그 입에 감람 새 잎사귀가 있는지라 이에 노아가 땅에 물이 감한 줄 알았으며 또 칠 일을 기다려 비둘기를 내어 놓으매 다시는 그에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더라 육백일년 정월 곧 그 달 일일에 지면에 물이 걷힌지라 노아가 방주 뚜껑을 제치고 본즉 지면에 물이 걷혔더니 이월 이십칠일에 땅이 말랐더라 하나님이 노아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너는 네 아내와 네 아들들과 네 자부들로 더불어 방주에서 나오고 너와 함께한 모든 혈육 있는 생물 곧 새와 육축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 이끌어 내라 이것들이 땅에서 생육하고 땅에서 번성하리라 하시매 노아가 그 아들들과 그 아내와 그 자부들과 함께 나왔고 땅 위의 동물 곧 모든 짐승과 모든 기는 것과 모든 새도 그 종류대로 방주에서 나왔더라
노아 홍수의 사건은 꼭 알아 두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실 때는 노아의 때와 같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마24:36~37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예수 재림의 때는 바로 노아 때와 같이 되어 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노아 때에 어떤 사건의 어떤 내용이 있었는가를 알 때에 말세를 예비하고 준비하는 구원의 백성이 될 줄로 믿습니다.
마태복음 24장 36~37절의 말씀을 보면 서로 상반되는 내용으로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서로 반대가 된다는 것입니다. 서로 상반되고 반대가 되는 것을 알지 못하는 자들은 정말로 성경에 무식하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자세히 보면 상반되는 것 같지 않은데 더 자세히 보면 확실하게 상반됩니다.
내용인즉「그러나 그 날과 그때는 아무도 모르나니」라고 했습니다. 그 날이라는 것은 로마서 2장 16절 말씀에 보면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 하시는 그 날이라고 했습니다.
사27:1 그 날에 여호와께서 그 견고하고 크고 강한 칼로 날랜 뱀 리워야단 곧 꼬불꼬불한 뱀 리워야단을 벌하시며 바다에 있는 용을 죽이시리라
그 날은 여호와의 크고 강한 칼로 뱀을 벌하며 바다에 있는 용을 죽이는 날입니다.
마24:36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그 날은 알 수 없다고 해서 찬송 부를 때“주 장차 강림하실지 혹 밤에 혹 낮에 또 주님 만날 그 곳도 난 알 수 없도다.”이렇게 찬송을 부릅니다. 그런데 37절 말씀은 그 날 곧 심판의 날을 알 수 있다는 내용입니다. 어째서 알 수 있는지 보시겠습니다.
마 24:34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노아의 가족들은 홍수 심판의 그 날을 사전에 알고 있었습니다.
창7:4 지금부터 칠 일이면 내가 사십 주야를 땅에 비를 내려 나의 지은 모든 생물을 지면에서 쓸어 버리리라
「지금부터 칠일이면」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정확하게 알려준 7일 후에 땅 속에 있는 깊은 샘물이 폭포수 같이 솟아나서 홍수가 나기 시작을 했고(창7:11) 하늘에서 40주야 비가 내려서(창7:12), 홍수가 온 세상의 높은 산을 덮기 시작 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노아의 가족에게는 심판의 그 날을 알게 해 준 것입니다. 그럼 노아 홍수 때에 누가 죽었는가 하면 홍수 심판이 있을 것을 알고 있는 노아의 가족들은 살았지만 모르는 자들은 다 죽었습니다. 노아 때와 같다는 것은 진리의 말씀을 통해서 하늘의 뜻을 아는 자들은 살고, 모르는 자들은 다 죽는다는 것입니다. 그 날, 그 때를 노아의 가족들에게는 알게 해 주었습니다. 롯의 심판 때에도 롯의 가족에게는 알게 해 주었습니다(창19:15).
니느웨 심판 때에도 하나님께서 날짜를 정해서 알려주었습니다(욘3:4).「지금으로부터 40일 후면」하고 알려주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소돔의 심판에 대하여「아브람에게 숨기겠느냐」고 하였고(창18:17),「내일 아침 동틀 때에」라고 알려주었습니다(창19:15).
노아 때는“칠일 후면”이라고 알려 주었는데 그날이 노아의 때와 같다면 반드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알게 해 주시되 심판 받을 자들은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알 수가 없기 때문에 도적 같이 그 날이 오는 것입니다.
아모스 3장 7절에「주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않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리라」고 까지 말씀하였습니다. 주의 재림에 관하여는 예수님이 도적같이 오신다고 했습니다.
살전 5:1~ 2 형제들아 때와 시기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주의 날이 밤에 도적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앎이라
도둑이 집 주인이 알지 못하도록 오듯이 그 날이 도적같이 온다는 것입니다. 도둑이 언제 올 줄 알았더라면 몽둥이를 가지고, 그물망을 가지고 기다리고 있던지 무슨 대책을 세울 것입니다.
도둑이 새벽 2시 15분에 정확히 온다면 그때 준비하고 있지 않을 사람들이 어디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잠을 자지 않고 온 식구가 깨어 있다가 도적을 방비할 것입니다. 큰 아들은 도둑이 오면 도둑의 발을 걸어 넘어뜨리고 꼬맹이는 112번으로 경찰서에 전화를 하고, 부인은 물을 펄펄 끓이고 있다가 덮어씌우는 등 도둑을 잡을 만반의 준비를 할 것입니다.
불이 훤하게 켜있고, 사람 소리가 나고, 깨어 있는 집에는 도둑이 절대로 들어가지 못합니다. 문을 열어보고 깊은 잠이 들어서 코 고는 소리가 나면 도둑이 큰 소리치고 물건을 훔쳐 가도 모르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잠자는 신앙을 가진 영혼의 집에 그 날이 도적같이 임하는 것입니다.
심판과 구원은 동시성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노아 때에도 심판과 구원이 동시성으로 이루어졌고, 롯의 때에도 동시성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므로 주 재림의 그 날은 노아 때와 같고, 롯의 때와 같다고 말씀하셨다는 것을(눅17:26~30) 깨닫기를 원합니다.
그러므로 도적 같이 오시는 주님을 기다리는 자들에게는 멸망이 홀연히 순식간에 갑자기 이르리니 결단코 피하지 못하리라고 했습니다(살전5:1~3).
살전 5: 3 저희가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잉태된 여자에게 해산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홀연히 저희에게 이르리니 결단코 피하지 못하리라
일본에‘쓰나미’홍수가 터지고, 지진이 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불과 5분 안에 도망을 가야 하는데 바로 도망간 사람은 살았고 핸드폰 가지러 갔던 사람은 죽었습니다.
큰 산 같은 파도가 2~3km의 도시를 덮칠 때에 속도가 얼마나 빠른지 자동차보다 더 빨라서 앞서 달려가는 자동차를 밀어서 물 위로 뒤집어 버리는 화면을 보았습니다.
말씀으로 인자의 때가 노아 때와 같다는 것을 상상만 했는데 일본에 집이 무너지고 순식간에 산 같은 파도가 쳐서 주택가를 밀고 공장 지붕을 넘었습니다.
이러한 현상이 큰 깊음의 샘이 먼저 터졌다고 성경에 기록된 것 같습니다. 뿐만 아니라 40주야 홍수가 나서 지구상에 모든 사람들이 죽은 것이 아니라 바다에 있는 물이 땅 위로 올라오고 땅 속에 있는 물이 다 솟구쳐 나왔습니다.
창7:11 노아 육백 세 되던 해 이월 곧 그 달 십칠일이라 그 날에 큰 깊음의 샘들이 터지며 하늘의 창들이 열려
땅 속의 물이 다 솟아 나오고 하늘의 물이 땅으로 다 쏟아졌습니다. 비도 오지 않는데 땅에는 홍수가 나서 마을마다 몰려드는 것입니다.‘쓰나미’도 마찬가지로 지진이 나고, 바다의 물이 솟아 땅으로 올라왔습니다. 비가 와서 물이 들어온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 이렇게 자세하게 기록이 되어 있는데 사람들이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지진으로 일어나는 그 파도의 힘이 바다의 물을 땅으로 솟아 올린 것입니다. 참으로 대단합니다.
일본에서 일어난 지진으로 요동한 물이 하와이까지 큰 파도를 일으켜서 들어갔습니다. 부분적이나마 일본의 대홍수 사건은 땅 위의 큰 깊음의 샘이 터져서 홍수가 나서 심판을 했습니다.
살전5:4~5 형제들아 너희는 어두움에 있지 아니하매 그 날이 도적같이 너희에게 임하지 못하리니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두움에 속하지 아니하나니
빛의 아들에게는 심판의 그날이 도적 같이 임하지 못할 줄로 믿습니다. 어둠에 속한 자들 곧 밤의 아들들에게는 그 날이 도적 같이 임하는 심판이 있겠지만 빛의 아들들에게는 그 날이 도적같이 임하지 못하리라고 하였습니다.
노아 때에 있었던 것 같이 성경대로 보면 예수님이 오시는 인자의 때 곧 마지막 때에도 그렇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방주에 들어갔는지 알아보겠습니다.
창 6:9 노아의 사적은 이러하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노아가 하나님과 동행 했으니 하나님께서 심판의 그 날을 알려주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도 하나님께서 알려주셨습니다(창18:17).“나의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이렇게 말하고 소돔 고모라의 심판을 알려 주었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한 자는 지금은 알 수 없으나 심판할 때가 되면 알 수 있게 된다는 것을 깨닫기를 원합니다.
창7:1 여호와께서 노아에게 이르시되 너와 네 온 집은 방주로 들어가라 네가 이 세대에 내 앞에서 의로움을 내가 보았음이니라
노아에게 너와 온 가족은 방주에 들어가라고 하였습니다. 종말에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사람은 노아의 때와 같이 이 세대에 의로움을 보여야 됩니다. 이 세상과 짝이 되는 사람은(약 4:4) 구원 받을 수가 없습니다. 세상을 벗어난 하늘에 속한 자가 될 때에 구원이 보장 되는 줄로 믿습니다.
겔14:13~14 인자야 가령 어느 나라가 불법하여 내게 범죄하므로 내가 손을 그 위에 펴서 그 의뢰하는 양식을 끊어 기근을 내려서 사람과 짐승을 그 나라에서 끊는다 하자 비록 노아, 다니엘, 욥, 이 세 사람이 거기 있을찌라도 그들은 자기의 의로 자기의 생명만 건지리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겔14:19~20 가령 내가 그 땅에 온역을 내려 죽임으로 내 분을 그 위에 쏟아 사람과 짐승을 거기서 끊는다 하자 비록 노아, 다니엘, 욥이 거기 있을찌라도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그들은 자녀도 건지지 못하고 자기의 의로 자기의 생명만 건지리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시니라
비록 노아와 다니엘, 욥이 심판 받을 자 중에 함께 있다고 할지라도 그들은 자녀도 건지지 못하고, 자기의 의로 자기만 구원 받는다고 했는데 노아는 어째서 가족들을 구원했는가 하는 것입니다.
노아의 가족들은 공짜로 구원 받은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 구원 받았는지 보시겠습니다.
벧후2:5 옛 세상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오직 의를 전파하는 노아와 그 일곱 식구를 보존하시고 경건치 아니한 자들의 세상에 홍수를 내리셨으며
기록된 말씀과 같이 노아의 가족들은 하나님의 의를 전파했습니다. 그래서 비록 자기의 친아들이라도 노아와 욥 같은 선지자가 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의(義)에 참여하지 않으면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기를 원합니다.
자기의 의로 자기가 구원 받는 것이지 남의 의로 자기가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일이라고 하지만 인간이 인간의 일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내일 당장 먹을 것도 없고, 차비도 없고, 아이들 학비도 줘야 하는데 교회에 가서 말씀 들으려고 하니 말씀이 귀에 들어오지 않을 것입니다.
교회에 가서 설교 시간에 참석하였으므로 말씀을 듣지 않을 수 없으니까 듣기는 들어도 달콤한 맛이 나진 않을 것입니다.
육신도 어느 정도 길이 열려서 삶에 아주 풍족하지는 못하지만 사람 노릇을 할 수 있어야 하나님의 일을 하던지 주의 일을 하던지 할 것이 아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노아를 보고 산에서 구원의 방주를 지으라고 하셨습니다.
히11:7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지 못하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예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좇는 의의 후사가 되었느니라
노아도 하나님으로부터 경고를 받을 때는 잘못이 있었으니까 경고를 받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경고를 받을 때에, 선지자들로부터 경고를 받을 때에는 달게 받는 자가 되어야할 줄로 믿습니다. 남의 자식을 어떻게 경고하고 남의 자식을 어떻게 때릴 수가 있겠습니까? 자기 자식이므로 때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잘못을 경고하심 받을 때에 믿음을 좇는 의의 후사가 되어야 합니다. 옳고 정의로운 일을 증거하고 가르칠 때는 어떠한 매 맞음이 있어도 바른 길을 가야 할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방주를 짓는데 잣나무로 방주를 지으라고 했습니다.
창6:14 너는 잣나무로 너를 위하여 방주를 짓되 그 안에 간들을 막고 역청으로 그 안팎에 칠하라
역청은 송진, 기름덩어리입니다. 물이 새지 못하도록 통나무 사이에 역청을 바른 것입니다. 방주를 노아 혼자서 만들었겠습니까? 노아에게는 건장한 아들들이 있었습니다.
산꼭대기에 배를 지은 것이 아닙니다. 어리석은 자들은 산꼭대기에 배를 지은 줄 아는데 제가 주일학교 선생 노릇할 때 이 찬송을 불렀습니다.
“노아 할아버지 배를 짓는다. 노아 할아버지 배를 짓는다, 높은 산꼭대기에서 배를 짓는다. 앞집에 김서방, 뒷집에 박서방, 모두 모두 반대하여도 하나님의 명령대로 순종하면서 높은 산꼭대기에다 배를 짓는다.”주일 학교 학생들에게 이러한 노래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노아 방주를 지을 때에 산꼭대기에 배를 지은 줄 알았는데 물에 떠오름으로 배가 떠서 산꼭대기에 머물렀다고 했지 산꼭대기에다 배를 지었다는 말은 없습니다. 산 밑에다 배를 짓고 위에서 줄을 달아 나무가 내려오도록 했을 것입니다.
노아의 아들들과 노아가 나무에 도끼질을 하고, 자르고, 아내들은 역청을 바르고, 칠해서 온 가족이 함께 방주를 지었습니다. 방주를 지은 자 만이 홍수심판 때에 구원의 방주를 탔습니다. 여러분들은 방주를 짓는 자들로 축복되시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지을 방주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방주를 백향목으로 지으라고 했습니다. 그러한 이유가 있습니다.
시104:16 여호와의 나무가 우택에 흡족함이여 곧 그의 심으신 레바논 백향목이로다
레바논 백향목은 하나님을 상징한 나무입니다.
시104:17 새들이 그 속에 깃을 들임이여 학은 잣나무로 집을 삼는도다
백향목에 새가 와서 깃들인다고 하였습니다. 백향목은 하나님의 나무지만 학은 잣나무로 집을 삼는다고 말씀했습니다.
그럼 학은 실제로 공중에 날아다니는 학인지 그 학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는지 보시겠습니다.
렘8:7 공중의 학은 그 정한 시기를 알고 반구와 제비와 두루미는 그 올 때를 지키거늘 내 백성은 여호와의 규례를 알지 못하도다 하셨다 하라
공중의 학은 하늘의 정한 시기와 때를 안다고 하였습니다.
음력 3월이면 반구와 제비와 두루미가 절묘하게 그 때를 알고 지켜서 옵니다.
공중에 높이 뜬 학은 먼 시기를 알아서“아, 언제쯤 봄이 오겠구나, 저 전라남도하고 제주도에는 벌써 매화꽃이 피었구나. 내일이면 충청도로 올라오고, 그 다음 주면 경기도로 올라오고, 다음에는 서울에 꽃이 피어나겠구나.”하며 봄이 오는 것이 공중에서는 눈에 보이는 것입니다.
만계일학(萬鷄一鶴)이란 말이 있습니다. 닭이 만마리가 있으면 그 중에 한 마리가 학(鶴)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흔한 것이 닭이고, 함부로 지저귀는 만명 중에 한 사람이 학과 같이 장래의 일, 미래에 되어 질 일을 아는 아주 고귀한 사람이 있다는 뜻입니다.
학은 하나님의 사자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또한“만학일봉(萬鶴一鳳)”이란 말이 있습니다. 학이 일만 마리가 있으면 그 중에 봉이 한 마리가 있다는 뜻입니다.
봉이라는 것은 실제로 세상에 존재하는 새는 아닙니다. 환상 중의 새인데 모든 새들의 황제 같은 새를 봉황새라고 합니다. 우리나라 대통령 휘장이 봉황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와 같이 존귀한 자들을 비유하여 만계일학(萬鷄一鶴)이라고도 하고, 만학일봉(萬鶴一鳳)이라고도 합니다.
노아 같은 존귀한 선지자를 비유한 것입니다. 때와 시기를 아는 학은 잣나무로 집을 삼았습니다.
그러므로 노아가 그 시대의 학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상징한 잣나무로 구원의 방주를 만든 것인 줄로 믿습니다. 또한 여러분이 장래의 되어 질 때를 아는 학이 되기를 원합니다(렘8:7)
동전 500원 짜리에 날아가는 학이 있는데 그것을 보시거든 예레미야 8장 7절을 생각하기를 원합니다.
노아의 가족은 때를 아는 학의 가족들로서 잣나무로 집을 삼은 것과 같이 여러분들 또한 때를 아는 학(鶴)과 같은 선지자들로서 때를 얻을 수가 있지만, 때를 모르는 자들은 구원의 때를 놓칠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깨달은 말씀을 전해야 합니다.
노아의 방주가 아라랏 산에 머물렀을 때에 물이 감한 줄 알고 노아가 40일을 지나서 까마귀를 먼저 내어 보냈는데 오늘날 목회자들은 까마귀를 사단이라고 하는 자들도 있습니다.
어릴 때 배운 시조에 보면“까마귀 노는 곳에 백로야 가지마라. 창파(滄波)에 고이 씻은 몸 더럽힐까 하노라”라는 시조가 있는데 이를 생각하고 까마귀는 나쁜 새 구나, 그렇게 알아 왔는데 이 까마귀는 성경에 어떻게 기록이 되어 있는지 보시겠습니다.
창8:6~7 사십 일을 지나서 노아가 그 방주에 지은 창을 열고 까마귀를 내어 놓으매 까마귀가 물이 땅에서 마르기까지 날아 왕래 하였더라
까마귀는 노아의 은혜를 잊지 못하고 땅에서 물이 마르기까지 계속 방주를 왕래 했습니다. 왜 그랬는가 하면 이 까마귀는 은혜를 아는 은조의 새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새들이 있지만 까마귀 같이 부모를 아는 은조의 새는 없습니다.
까마귀는 어릴 때 자기 어미가 먹을 것을 자기 입에 넣어주었기 때문에 까마귀는 부모새가 죽을 때까지 옆에 있다가 부모새가 병들면 먹을 것을 부모새에게 먹여준다고 합니다. 그래서 효조(孝鳥)라고 말을 합니다. 까마귀는 성경으로 볼 때에 굉장히 좋은 의미로 남아 있었습니다.
눅12:24 까마귀를 생각하라 심지도 아니하고 거두지도 아니하며 골방도 없고 창고도 없으되 하나님이 기르시나니 너희는 새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기록된 말씀에서 같은 값이면 성령을 상징한 비둘기를 생각하라고 하지 예수님께서 왜 까마귀를 생각하라고 했는가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새 중에 하나를 생각하라고 하면 아마 까마귀를 생각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까마귀는 하나님께서 직접 기르시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을 모르고 까마귀를 사단이라고 하는데 까마귀는 사단이 될 수가 없습니다.
엘리야가 3년 반 동안 비가 오지 않는다고, 악한 아합 왕에게 경고하고 숨어 있었습니다. 이에 엘리야를 찾느라고 온 나라 대신들이 총동원 됐습니다. 엘리야가 그릿 시냇가에 숨어 있을 때에 먹을 것이 없자 까마귀가 먹을 것(고기와 떡)을 갖다 주었습니다. 기가 막힌 사연입니다.
아름다운 새들이 얼마든지 있는데 왜 까마귀가 엘리야에게 떡과 고기를 갖다 주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당시에 기근으로 인해 물 한 모금이라도 찾을 때인지라 떡만 먹어도 다행인데 고기까지 갖다 준 것입니다.
왕상 17:4~6 그 시냇물을 마시라 내가 까마귀들을 명하여 거기서 너를 먹이게 하리라 저가 여호와의 말씀과 같이 하여 곧 가서 요단 앞 그릿 시냇가에 머물매 까마귀들이 아침에도 떡과 고기를, 저녁에도 떡과 고기를 가져왔고 저가 시내를 마셨더니
엘리야 당시에 까마귀를 실제 날짐승 까마귀로 알고 있었습니다. 까마귀는 하나님께서 보낸 밀사를 상징한 새로서 즉 비유한 말씀입니다.
이제는 엘리야가 더 이상 숨을 곳이 없어서 물 한 모금 먹고 자살할까 생각하고 로뎀 나무 아래 누워서 기진맥진하고 쓰러져 있었습니다. 바로 그때 깨우는 천사가 있었습니다. 힘을 내라고 떡과 생선을 구워서 주었습니다.
까마귀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밀사(密使)인 천사였습니다.
왕상19:5~7 로뎀나무 아래 누워 자더니 천사가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하는지라 본즉 머리맡에 숯불에 구운 떡과 한 병 물이 있더라 이에 먹고 마시고 다시 누웠더니 여호와의 사자가 또다시 와서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네가 길을 이기지 못할까 하노라 하는지라
실상으로 엘리야에게 먹을 것을 갖다 준 것은 날 짐승 까마귀가 아니라 여호와의 사자 천사였습니다. 까마귀는 숨어 있는 천사를 비유한 것입니다.
그러므로“까마귀를 생각하라. 하나님이 기르시느니라(눅12:24)”고 했습니다. 이와 같이 숯불에 구운 떡과 물 한 병을 갖다 주었습니다. 성경에 엄청난 비유들에 대하여 오해들을 많이 하고 있는데 까마귀에 관해서 다시 한 번 큰 깨달음이 있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잠30:17 아비를 조롱하며 어미 순종하기를 싫어하는 자의 눈은 골짜기의 까마귀에게 쪼이고 독수리 새끼에게 먹히리라
아비를 조롱하고 어미 순종하기를 싫어하는 자의 눈은 골짜기에 들어가면 까마귀가 눈을 빼먹는다고 했습니다.
왜 까마귀가 불효자의 눈을 빼먹었는가 하면“이놈아, 나는 날 짐승이지만 부모님에게 효도하는 효조야, 너는 사람 이 어째 아비를 조롱하고 어미에게 불순종 해! 너 까짓거 눈알 빠져도 괜찮아”하며 오죽하면 까마귀가 불효자의 눈을 빼어 먹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요즘 시아버지, 시어머니가 아프다고 하면 가보지 않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만약에 부모를 외면하고 가족을 돌보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까마귀에게 눈을 빼가게 할지 모릅니다.
옛날에는 제주도에 까마귀가 없었는데 지금은 까마귀가 양 사방에 많이 생겼습니다. 눈 빠질 사람이 많으니까 까마귀가 필요하지 않았는가 생각을 해봅니다.
그 다음에 비둘기에 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비둘기를 내어 보냈는데 비둘기가 앉을 곳이 없어서 그냥 돌아와 버렸습니다. 비둘기는 성령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비둘기를 다시 내어 보냈는데 또 돌아왔습니다.
세 번째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이 세상의 물이 홍수가 된 원인은 네피림 족속들의 가증한 행위를 하나님께서 용서할 수 없어서 심판을 했습니다(창6:4~7).
그래서 더러운 세상에 오염된 그 물 위에 성령의 비둘기가 앉을 자리가 없었습니다. 그 더러운 죄악의 물이 다 빠져 나가야 성령의 비둘기가 앉을 수가 있습니다. 이는 곧 성령이 임재 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두 번째 내어 보냈던 비둘기는 돌아 왔고, 세 번째 비둘기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물이 다 마른 것을 알고 방주에서 노아 가족들이 내렸습니다.
첫 번째 비둘기는 예수님이 받은 비둘기 같은 성령의 시대를 상징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비둘기 같은 성령을 받으셨는데 그리스도 복음을 받는 자가 없었습니다. 수제자 베드로도 예수님을 배신했습니다.
비둘기 같은 성령이 임재 할 수가 없는 시대였습니다.
두 번째 비둘기 시대는 오순절 날 내린 불같은 성령의 시대입니다.“불로, 불로 충만하게 하소서”하며 파도 같이 많은 사람들이“불로, 불로”했지만 불같은 성령의 시대에도 이 땅 위에 참 하나님의 말씀은 임재하지 못했습니다.
병 고치는 은사와 기사와 이적이 많이 일어났지만 불같은 성령을 받아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알 수가 없었으므로 하나님의 뜻을 알 수가 없었습니다.
세 번째 비둘기는 땅 위에 앉은 것입니다. 세 번째 비둘기는 진리의 성령인줄로 믿습니다(요16:13).
요한복음 17장 17절에 진리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세 번째 비둘기 성령이 앉은 것은 하나님께서 이 땅 위에 임재 하셔서 새로운 세상, 노아가 방주에 내려서 새로운 신천지와 같은 축복의 세상이 오게 될 것을 예언했습니다.
지금 이 시대는 세 번째 비둘기가 강림해서 땅에 앉은 즉 하나님의 신이 임재하시는, 진리의 말씀이 임재하시는 진리성령의 시대로써(요16:13) 우리가 주님을 영접하는 귀한 자들로 축복되시기를 예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