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요한의 우문(愚問)과 예수의 현답(賢答)
본문말씀 : 마태복음 11장 1~6절
예수께서 열 두 제자에게 명하시기를 마치시고 이에 저희 여러 동네에서 가르치시며 전도하시려고 거기를 떠나 가시니라 요한이 옥에서 그리스도의 하신 일을 듣고 제자들을 보내어 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우문(愚問)이라는 것은 어리석은 질문을 말합니다. 현답(賢答)이라는 것은 현명한 답변으로 또는 현자(賢者) 곧 미래와 과거를 아는 자로서 어질고 총명하여 성인 같은 자를 현자 혹은 현인의 답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7: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교회에 나가는 것은 무슨 도덕교육을 받으러 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도덕적인 것을 모르는 것보다 알고 지켜서 행하는 것도 좋겠지만 무엇인가 믿을 것이 있고 바랄 것이 있을 때에 신앙을 하러 나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 근본 목적은 우리 영혼의 구원과 또한 육체 구원의 축복입니다.
그러므로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라는 것은 지금 천주교와 기독교인들이 전 세계적으로 20억이나 되는데, 이 기독교인들이 “주여! 주여!” 외치고 있지만 그들이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만 들어간다고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는 알아야 하나님의 뜻대로 행할 것입니다. 양 떼들의 인도자는 하나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해 주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게해 주면,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그렇지 않고 신앙하는 것은 각자의 책임에 달려 있으나 참 목자라면 자기로 인하여 하나님을 믿는 모든 자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해주고 난 뒤 도덕교육과 같은 것들은 자기 스스로도 알 수가 있고 성경을 통해서도 도덕적인 신앙인격이 세워질 수가 있습니다. 마치 교회가 불교나 유교처럼 어떠한 도덕 교육이나 받는 곳으로 알고 있어서는 안되겠습니다.
기독교는 예수 십자가를 통한 부활의 종교요 거듭남의 종교라는 것을 깨닫기를 원합니다. 거듭난다는 것은 악한 사람이 선한 사람으로 바뀌는 것도 좋겠지만 이것은 마치 올챙이가 전혀 다른 개구리로 모든 모습과 모양과 행위가 바뀌고 굼벵이가 매미가 되는 것처럼 하늘과 땅 차이로 변화 받는 것을 말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시게 되면 예수님께서 열 두 제자에게 명하시기를 마치고 이에 저희 여러 동네에서 가르치시며 전도하시려고 자리를 옮겨 다니실 때 세례 요한은 감옥에 갇혀 있었습니다. 그 때 세례 요한이 헤롯왕에게 동생의 부인을 취했다는 도덕적인 불륜관계를 비방하고 지적하다가 감옥에 갇혔습니다. 원래 요한의 사명은 예수의 길을 예비하는 사명이었는데 예수의 길을 예비하다가 감옥에 들어간 것이 아니고 헤롯왕의 부도덕함을 논하다가 감옥에 갇힌 것입니다. 이 때 감옥에 갇힌 세례 요한은 그리스도의 하신 일을 듣고 요한의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어서 질문을 하게 됩니다. 이 질문은 바로 어리석은 질문 곧 우문(愚問)이었습니다.
마11:3 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예수님이 들을 때는 청천벽력(靑天霹靂=맑게 갠 하늘에서 갑자기 떨어지는 벼락이라는 뜻)과 같은 말입니다. 예를 들어 결혼하기로 약속했던 처녀와 총각이 있었는데 약혼을 하고나서 결혼할 날을 며칠 앞두고 총각한테 처녀가 하는 말이 “당신이 나하고 결혼하는 것이 맞습니까 맞지 않습니까?” 하고 물어본다면 신랑에게는 청천벽력과 같은 말입니다.
요단강에서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보고 증거 하기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 1:29)” 라고 하였고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임하는 것을 봄으로 이는 하나님이 보낸 어린 양인 줄 알라 하기로 그 사실을 눈으로 직접 보고 내가 그를 증거 하였노라(요 1:33~34)” 말한 세례 요한은 또 예수님에 대하여 말하기를 “나는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마 3:11)”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이러한 세례 요한이 예수님에 대하여 “오실 그이가 당신입니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라고 한 것은 주의 길을 예비하려고 온 요한이라고는 도저히 인정할 수 없는 정신이상자에 해당되는 자로서 예수를 극히 모독하는 죄를 범한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자기 입으로 예수님을 증거하고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그 예언대로 “주의 길을 광야에서 예비하는 자(마3:1~3)”라고 까지 말을 했던 세례 요한이 예수님에 대하여 “오실 그 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마11:3)” 라는 이런 어리석은 질문을 한 것입니다. 이는“당신이 진짜 메시아입니까? 가짜 메시아입니까?” 하고 묻는 것과 같습니다.
교회에 한 삼년을 다녀서 목사님과 가까이 지내고 교회의 사정을 잘 알면서 “목사님이 이 교회의 당회장 목사님이 맞습니까? 맞지 않습니까?” 그렇게 묻는다면 정신이상자 같은 어리석은 자가 되는 것입니다. 온 세계 사람들이 모두 예수님이 오실 자가 아니라고 말하여도 세례 요한 만큼은 “오실 그 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이런 질문을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세례 요한을 위대한 선지자라고 보는 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볼 때에 ‘세례 요한보다 더 무지하고 어리석은 자가 있을까’ 라는 생각을 합니다. 오늘 이 말씀 속에 숨어 있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바로 깨닫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원합니다.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하는 것은 당신이 “진짜요 가짜요” 하고 묻는 말이나 다름이 없는 것입니다. 그 때에 예수님께서 답변하시기를 “그래, 맞다! 내가 오실 그이가 맞다.” 라고 하셨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야곱의 우물가에서 물을 긷는 여인을 만났을 때에 그 여인이 예수님께 말을 했습니다.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다 알게 해 준다고 하였는데 오실 그이가 맞습니까?” 하고 물어보니까 예수님이 바로 “내가 그니라” 라고 답변을 했습니다.
요4:25~26 여자가 가로되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고하시리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말하는 내가 그로라 하시니라
이름도 없고 성도 없는 야곱의 우물가에서 만난 여인에게는 “내가 그로다” 라고 답변을 하셨는데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대로 온 세례 요한이 예수에 대하여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하고 문의하였을 때에는 예수님은 피하셨습니다. 이는 답변할 가치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의 어리석은 질문에 예수님이 어떻게 답변하셨는지를 알아봄으로서 세례 요한의 믿음을 다시 한 번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이는 세례 요한이 야곱의 우물가에서 만난 여인의 신앙보다도 못한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그 때에 예수님께서 답변하는 내용을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마11:4~5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이 내용은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아니면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하는 질문의 답변입니다. “이것을 요한에게 알려주어라”라고 했습니다. ‘소경이 보며’ 하는 말이 무슨 뜻인가 하면 세례 요한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는 영적인 소경이었던 것입니다. 소경이 만약 눈을 떴다면 그는 어둠에서 빛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소경은 심령이 어두워서 미래의 세계를 바라보지 못하는 영적인 소경, 곧 영맹(靈盲) 세례 요한이라는 뜻입니다.
‘앉은뱅이가 걸으며’ 하는 것은 세례 요한은 앉은뱅이라는 뜻입니다. 이사야의 예언대로 주의 길을 예비하러 온 요한이(마3:1~3) 예수에게 세례를 준 이후(마3:13~17) 단 한 번도 예수를 찾아오지 아니하였습니다. 이러한 자가 어찌 주의 길을 예비하는 자가 되겠습니까. 세례 요한은 앉은뱅이였습니다. 예수님이 요한의 제자들에게 ‘앉은뱅이가 걸으며’ 라고 한 것은 실상으로 앉은뱅이를 고쳐서 걷게 하였지만 이는 세례 요한을 빗대어 앉은뱅이라고 한 것입니다.
육적인 귀머거리가 듣게 되었지만 요한은 하늘에서 나는 소리‘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마 3:17)’ 는 소리를 들은 자가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라고 한 것은 요한이 귀머거리라는 뜻입니다. 또한 ‘죽은 자가 살아나며’라고 한 것은 예수님이 죽은 자를 살리셨지만(요11:43~44) 세례 요한이 살았으나 영적으로는 죽은 자와 같았기 때문입니다(계3:1). 예수님이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신 마태복음 11장 4절에서 5절까지의 말씀은 세례 요한을 빗대어 하신 말씀입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이 세례를 받을 때 하늘에서 음성이 들리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라는 음성을 들었고 또 성령이 비둘기 같이 강림한 그 광대한 빛, 그 찬란한 빛을 세례 요한은 눈으로 직접 보았습니다(마3:16~17).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요1:5) 그 빛을 세례 요한이 증거 하러 온 사명자인데 그런 자가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이렇게 말을 한 것입니다. 이는 요한이 예수님에 대한 증거가 모두 거짓이라고 말한 것과 같으며 이는 예수를 비꼬아 비하하고 더 이상 예수를 부인할 수 없는 악한 말을 하였기 때문에 요한은 하늘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빛을 본 모든 것도 다 망각한 어리석은 자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요1:6~8 하나님께로서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났으니 이름은 요한이라 저가 증거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거하고 모든 사람으로 자기를 인하여 믿게하려 함이라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거하러 온 자라
그는 예수님의 빛에 대하여 증거 하러 온 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 빛이 되신 예수님을(요8:12) 보고도 밝음을 알지 못하는 영맹(靈盲)의 소경이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요한의 제자들에게 ‘소경이 보며’ 하는 것을 알려 주라고 했습니다.
인간은 심안(心眼=마음의 눈)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상대방과 대화를 할 때 상대방의 눈을 보고서 상대방을 아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바로 심안의 눈이 어두운 영맹(靈盲)자 였습니다. 마음의 눈이 어두운 사람에게는 눈꺼풀에 비늘이 덮인 것입니다. 영적으로 보면 세례 요한은 곧 백내장 병에 걸린 것입니다. 요즘에는 비늘이 덮인 것을 벗겨내는 각막 수술을 하면 볼 수 있지만 두 번 수술하기는 어렵다고 합니다. 세례 요한의 눈에 영안의 뱀 껍질이 덮여 있었기 때문에 예수를 바로 보지 못했습니다. 영안이 열리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우리 인간의 모습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마음의 영안이 열린 사람은 “앞으로 이 나라의 국가가 어떻게 될 것이고 이 민족이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 세상 되어질 장래의 일을 알겠지만 세례 요한은 그 눈이 열리지 않은 영맹(靈盲)이요 소경의 눈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영적으로 소경된 자들에 관하여 하신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요9:39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 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심판하러 왔다고 하면, 죽이고 죄인들을 감옥에 보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보지 못하는 자, 성경을 알지 못하는 자들로 성경을 보게 하고 성경을 잘 안다고 하는 신학자들을 소경되게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성경을 보고 가르치는 신학자들을 소경되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요9:40~41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가로되 우리도 소경인가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소경 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
본다고 하는 자들이 전부 소경이라는 것입니다. 환상을 본다고 하는 것이 전부 미친 소리 하고 있는 소경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말씀을 통해서 볼 때 바리새인들은 영적으로 영맹(靈盲)들이었습니다.
육신적인 시력으로 하나님을 보려고 하면 볼 수가 없습니다. 영적인 시력으로만이 하나님을 볼 수가 있습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와 같이 마음이 청결해서 마음이 열려야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마5: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우리가 육신의 눈으로는 하나님의 세계를 볼 수가 없습니다. 영안이 열리지 않으면 하나님의 세계를 알 수 없고 아버지의 축복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을 전부 소경들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 제사장, 종교 지도자들을 전부 소경으로 봤습니다. 오늘날 이 시대도 그런지 모릅니다.
마23:16~17 화 있을찐저 소경된 인도자여 너희가 말하되 누구든지 성전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성전의 금으로 맹세하면 지킬지라 하는도다 우맹(愚氓)이요 소경들이여 어느 것이 크뇨 그 금이냐 금을 거룩하게 하는 성전이냐
우맹(愚氓)이라는 것은 어리석은 백성으로써 주의 뜻을 모르는 외식하는 자들을 가리켜서 우맹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말씀을 통해서 볼 때에 예수님 당시의 율법사 바리새인들이 우맹(愚氓)의 소경이었습니다.
그런데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말하였을 때에, 예수님께서 너희는 이렇게 가서 말하라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라고 하였습니다. 세례 요한은 영적으로 소경이요 영적으로 앉은뱅이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자들이 바리새인들의 밑에 있을 때에는 앉은뱅이였는데, 영안이 활짝 열리고 미래의 세계를 들여다보고 천국 비밀을 알고 나서 보니 너무너무 기뻐서 잠잠할 수가 없었습니다. 아침, 저녁 할 것 없이 예수님만 나타났다고 하면 사람들이 구름떼 같이 몰려드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이 그 전에는 앉은뱅이였는데 예수를 만나서 걷는 자가 된 것입니다.
앉은뱅이는 움직이지도 않으면서 입만 살아 가지고 말만 거창하고 행함이 없고 큰소리만 치는 자들입니다. 이런 자들이 종교 사기꾼들입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께 세례를 준 후에 죽을 때까지 단 한 번도 예수님을 찾아오지 아니하고 만나지 아니한 앉은뱅이였습니다.
마23:2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구약시대에는 제일 위대한 선지자를 모세로 봤습니다. 예수님 당시 제사장, 율법사들은 모세 같이 큰 지도자의 자리에 앉았다는 것입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자기가 예수님인체 하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마23:3~4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저희의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저희의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저희는 말만 하고 행치 아니하며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
예를 들어서 교회의 건축을 할 때 목사님도 현장에서 감독하는 작은 일이라도 하면 좋은데 손가락 하나 까딱 안하고 “수고들 하세요”하며 거룩함을 보이는 자들이 모세의 자리, 예수님의 자리에 앉은 것 같이 하는 자들입니다.
이와 같이 앉아서 있는 사람들이 앉은뱅이입니다. 왜 이런 말씀을 하셨는가 하면 세례 요한이 예수의 길 예비자라면 죽기 살기로 예수님을 선전하고 예수님과 같이 다녀야 되는데, 세례줄 때 한 번 만나고 죽을 때까지 예수님을 한 번도 만난 사실이 없습니다. 이러한 앉은뱅이가 어떻게 주의 길을 예비하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는 앉은뱅이인 것입니다.
요한이 왜 자기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어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하고 문의하게 하였겠습니까? 세례 요한이 하나님이 보내신 길 예비자라면 본인이 직접 찾아와서 물어보아야 하며 감옥에 갇히기 전에라도 예수를 찾아와서 물어봐야 하는데 물어보지 못한 것은 세례 요한이 앉은뱅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오신 목적은 세례 요한이 길 예비자가 되고 요한과 함께 영적인 앉은뱅이를 일으키며 죽어가고 썩어져 가는 신앙을 일으켜서 영적, 육적으로 두 수레바퀴가 되어 예수님과 함께 걸어가게 하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그런데 육적인 수레바퀴는 커다랗게 붙어있고 영적인 수레바퀴는 떨어져 나가고 없으니 마차가 기울어져서 사명의 짐을 끌고 나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육신적인 것은 생활이 넉넉하고 권세가 있어서 좋지만 영적인 신앙이 없는 사람은 믿음의 수레바퀴 즉 믿음의 길을 갈 수가 없습니다.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라고 했습니다. 타락한 신앙인들은 문둥이 곧 나병환자와 같습니다. 옛날부터 문둥병은 하늘이 준 벌이라고 해서 문둥병이 걸리면 동네 바깥으로 쫓아내 산 밑에 가서 움막치고 살게 하여 먹을 것을 그 밑에 갖다 놓고 먹게 했습니다.
문둥병은 세균이 침범해서 살을 녹여 없애 버리는 것입니다. 코가 떨어져 나가고 귀가 떨어져 나가고 손가락이 떨어져 나갑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이 마귀의 형상으로 바뀌어지는 것이 문둥병입니다. 그런 문둥병자가 깨끗함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무서운 문둥병의 균이 죽고 사라져 없어짐으로서 새 살이 돋아나고 본래의 예수님 형체,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참 인간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과거에는 괴팍하고 도둑질 잘하며 싸움질 잘하고 입만 열면 사기꾼인 사람이 그 병을 다 고쳐 즉 영적인 병을 고쳐서 온전한 사람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눈알 빠진 사람, 코가 비뚤어진 사람, 귀가 날아간 사람들은 영적으로 보면 몸 전체가 문둥병 환자인데 하나님의 말씀, 진리의 말씀으로 치료를 받게 되고 고침을 받게 된다는 사실을 예수님이 요한의 제자들에게 전하라고 한 것입니다. 이는 세례 요한이 문둥병자라는 것을 빗대어 말한 것입니다.
민12:14~15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그의 아비가 그의 얼굴에 침을 뱉았을찌라도 그가 칠일간 부끄러워 하지 않겠느냐 그런즉 그를 진 밖에 칠일을 가두고 그 후에 들어오게 할찌니라 하시니 이에 미리암이 진 밖에 칠일동안 갇혔고 백성은 그를 다시 들어 오게 하기까지 진행치 아니하다가
모세가 첩을 두었다고 해서 모세의 누나 미리암이 모세를 비방하자 아버지가 미리암의 얼굴에 침을 뱉어서 그 침이 문둥병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와 같이 칠일 정도는 부끄럽기 때문에 쫓아냈다가 다시 들어와 문둥병을 고쳐서 들어오게 해 주었습니다. 모세의 누나 미리암이 깨닫지 못하였을 때에는 문둥병자였고 깨달았을 때에는 문둥병을 고친 자가 된 것입니다. “귀머거리가 들으며”라고 하였는데 귀머거리는 들을 수가 없습니다.
계2:7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하리라
그러므로 성령이 하는 소리를 듣지 못하는 것이 귀머거리입니다. 믿는 자의 귀는 성령이 하는 소리를 들어라 하였기 때문에(계2:7). 성령의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귀가 없는 자는 영적으로 볼 때에 다 귀머거리입니다. 예수님이 요한의 제자들에게 귀머거리가 듣는다고 말씀하신 것은 세례 요한이 귀머거리란 뜻입니다.
요10:3~5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자기 양을 다 내어 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고로 따라 오되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
이 말씀을 자세히 보면 귀머거리가 된 양이 있음으로 그 양의 이름을 불러내면 그 양이 음성을 알아듣고 따라온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양도 귀머거리 양이 있고 참 양이 있습니다. 참 양은 참 목자의 음성을 알아듣고 귀머거리 양은 들어도 무슨 말인지 모릅니다. 이는 세례 요한이 예수의 길 예비자로서 왔지만(말3:1) 주님을 따르지 않는 귀머거리 양이라는 것을 비유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히4:2 저희와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그러나 그 들은바 말씀이 저희에게 유익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을 화합지 아니함이라
믿음을 화합하여 들을 때에 바로 참 양이 될 줄 믿습니다. 그 다음에 “죽은 자들이 살아나며”라고 했습니다. 듣는 것을 요한에게 고하라고 까지 말씀하신 것은(마11:4) 세례 요한이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라는 것입니다.
계3:1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진 이가 가라사대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신앙이 죽은 자가 살아난다는 것입니다. 영안이 살아나고 귀가 열리고 벙어리 되었던 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에 신앙이 살아나는 것입니다.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라고 했습니다.
마5: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세상의 잡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 마음이 하나님께 향한 한 가지 마음, 가난한 마음 밖에 없는 줄 믿습니다. 그래서 너무 부자가 되고 너무 권력 있는 사람들은 생각이 많아서 예수님을 믿을 시간이 없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이 귀에 잘 들어오지도 않습니다. 그냥 살만하고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 잘 믿는 가정이 가장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복이 있습니다. 그래서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고(마5:3) 말씀하신 것을 깨닫기를 원합니다.
이러한 것들을 보면 세례 요한은 영적으로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 된 자라는 것을 은유(隱喩=숨어서 비유하는 수사법)한 것이요 세례 요한은 소경이요 앉은뱅이요 문둥병자라는 것입니다.
마11:3~6 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기록된 말씀과 같이 세례 요한은 예수님에 대하여 실족함으로 예수님은 세례 요한의 제자들에게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 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세례 요한의 제자들에게 은유(隱喩=숨은 비유)법의 비유를 들어서 세례 요한은 예수님에 대하여 실족한 자(다리를 잘림 받아 다리가 없는 자)라고 직접 요한의 제자들을 통하여 저주하였으니 이는 영적으로 보면 다리를 잃어버린 실족(失足)한 자이기 때문에 세례식 이후 단 한 번도 예수님을 찾지 아니한 가증한 자였습니다. 이러한 세례 요한을 위대한 선지자로 보는 것은 성경에 심히 무식한 자들입니다.
스스로 주의 길을 예비하러 온 자라고 외쳤던 자(마3:3)요,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온 것을 직접 보고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는 하늘의 소리를 들은 자(마3:16~17)였지만 예수님에 대하여 시기하고 질투하여 단 한 번도 예수님을 찾아오지 아니하였습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에 대하여 확실하게 실족한 자였기 때문에 예수님은 또 다시 은유(隱喩)의 비유로 천국에 갈 수 없는 세례 요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마11:10~11 기록된바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저가 네 길을 네 앞에 예비하리라 하신 것이 이 사람에 대한 말씀이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
기록된 말씀과 같이 세례 요한은 내 앞서 길을 예비하는 사자가 맞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도 저(요한)보다 크다고 하심으로서 세례 요한은 영적으로 보면 천국에 들어갈 자격을 잃은 가증한 자요, 천국 바로 밑에 떨어진 자로서 실족한 자가 되었습니다.
자기 사명을 망각한 자들은 세례 요한 같이 예비 된 사자라고 할지라도 여지없이 저주의 심판을 면치 못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할 줄 믿습니다.
참으로 세례 요한의 어리석은 우문(愚問)에 예수님은 현답(賢答)을 하신 것이니 이러한 세례 요한을 위대한 선지자로 잘못 알고 있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자들이요, 오늘 이 말씀을 듣고 깨달은 자들은 그리스도와 같이 현답(賢答)을 할 수 있는 자들로서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들로 축복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