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예수의 고난과 승리
본문 말씀 : 누가복음 22장 42~46절
가라사대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사자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돕더라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 방울같이 되더라 기도 후에 일어나 제자들에게 가서 슬픔을 인하여 잠든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어찌하여 자느냐 시험에 들지 않게 일어나 기도하라 하시니라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으리라고 말씀을 하였는데(요3:16) 영생은 예수를 아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요17: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세상에서도 얼굴로만 안다고 사람을 아는 것이 아닙니다. 같이 식사를 했다고 아는 것도 아닙니다. 상대방을 아는 것은 심성을 알고 마음씨를 알아야 됩니다. 마음과 마음씨는 다릅니다. 씨라는 것은 숨겨진 것 아닙니까? 마음에 숨길 수 있는 그 마음을 말로써 심어질 때 그게 마음씨가 되는 것입니다. 마음은 있으되 씨가 없는 사람은 죽은 나무와 같습니다.
예수님은 좋은 씨를 뿌린 자입니다. 예수님이 뿌리신(전파하신) 말씀이 자기 마음속에 보관되어 있는 자가 참 예수의 마음씨를 가진 자가 됩니다. 이런 마음씨를 가진 사람은 예수님 말씀을 전할 때에 그 말씀이 상대방에게 씨를 심어줄 수 있는 것입니다. 심어주지 못하는 사람은 마음씨가 없는 사람은 닭의 무정란과 같은 것입니다. 달걀은 달걀인데 병아리가 되지 않는 닭의 알을 무정란이라고 합니다. 누구든지 예수의 마음씨를 가진 자는 천국의 아들이 됩니다. 예수님의 마음씨를 가지시길 원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어떤 분인가를 먼저 알아야 됩니다.
행13:22~23 폐하시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증거하여 가라사대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 하시더니 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이 사람의 씨에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주를 세우셨으니 곧 예수라
예수님은 다윗의 씨, 사람의 씨로 오신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인성과 심성이 우리 인간과 큰 차이가 없는 마음씨를 가지셨으나 하나님의 아들이 가진 그 마음씨와 인간이 가진 마음씨와는 족히 비교가 되지 아니한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이 제 마음과 어찌 그리 똑같은 말씀을 하셨는지 사람의 육신의 생명이 얼마나 귀중하냐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주만물을 말씀으로 창조하실 때,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태양아 있으라 하면 태양이 있었고, 식물아 있으라 하면 식물이 있었으며, 물고기야 있으라 하면 물고기가 있듯이, 쉽게 우주와 만물을 만드셨는데 하늘과 땅을 지으실 때에도 하나님이 손으로 직접 지으셨다고 했습니다(시102:25).
우주만물은 인간을 위하여 지으신 것입니다. 인간은 소중하고 귀한 것입니다. 그 넓은 우주 가운데서 식물이 살 수 있고 인간이 살 수 있는 곳은 단지 지구 이 한 곳 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과학적으로 하는 이야기입니다. 지구 외에 사람이 살 수 있는 곳은 아무데도 현재로서는 없습니다. 그리고 지구의 우주공간 대기권이 1,000km나 됩니다. 대기권의 1,000km 가운데서 그 공기 속에 온갖 인간이 살 수 있는 모든 것이 다 들어 있습니다. 그것은 지구의 보호막입니다.
하늘에서 천체의 별이 떨어지면 그 공기의 압력에 의해서 모든 것이 다 부숴지고 없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다른 별들과 다른 것입니다. 공기층은 우주의 파편을 막아주기도 합니다. 다른 별들은 서로 부딪히면 합쳐져서 하나가 되기도 하고 갈라져서 수많은 별똥별을 만들기도 하지만 지구는 누가 감히 손대지 못하도록 하나님께서 보호막을 쳐 주셨다 하는 것을 깨닫길 원합니다.
이 지구에 사는 인간을 위해서 우주만물이 창조되었다 이렇게 볼 수 있습니다. 인간이 없다면 우주만물의 창조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주만물을 만들면 뭐합니까? 어디에 써먹을 수가 있습니까? 아무 소용이 없지 않습니까?
마16:26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인간의 목숨이 정말로 소중하고 귀하다 하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류구원의 최고 목적은 우리 인간의 생명을 얼마나 보존하는지, 백년을 보존하는지, 천년을 보존하는지, 영생토록 보존하는지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제가 이번에 쓴 책자에 나와 있습니다만 아프리카에 있는 바호밥나무는 수명이 오천 년인데 그 속에 물통이 들어있어서 비가 올 때 잎과 뿌리로 수분을 다 흡수하여 물통에 물을 채워서 삼년, 사년 비가 오지 않아 바싹 말라도 바호밥나무 속에 있는 물통의 물로 나무가 성장합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사람의 수한이 나무의 수한과 같다고 했습니다(사65:22). 이런 입장에서 본다면 인간의 생명은 정말로 존귀하고 귀하다는 것이며 사람의 수명이 오늘날에 비해서 무한 장수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것을 아시는 예수님께서 천하를 주고도 네 목숨 하나를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겠느냐, “무엇을 주고 네 목숨과 바꾸겠냐”고, 하신(마16:26)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서 자기의 목숨을 버리려고 하였을 때 얼마나 그 소중함이 아까웠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소중한 생명을 함부로 해치며 사십일 금식기도 하다가 천하보다 귀중한 생명을 버리고 죽는 사람이 있으니 이보다 더 큰 이단이 천하 어디에 있겠습니까? 사람은 먹지 않으면 죽고 풀도 수분이 없으면 말라 죽게 되어 있습니다. 조금 일찍 죽는 것과 늦게 죽는 것과의 차이는 있습니다. 제가 나무를 사랑하다 보니까 아는데 나무는 맨 꼭대기에 있는 작은 가지의 잎이 맨 나중에 죽습니다.
그리고 맨 처음에 난 가지가 제일 먼저 죽습니다. 식물의 떡잎도 먼저 나온 것이 먼저 죽고 나중에 나온 새싹은 나무꼭대기에 있어도 먼저 마르지 않습니다. 먼저 나온 떡잎이 나는 살만큼 살았으니까 나중 태어난 너는 나보다가 오래 살아야 하지 않느냐, 하고서 자기는 말라죽고 꼭대기에 수분을 공급합니다. 나무 꼭대기가 살아 있어야 나무 전체가 살 수 있습니다. 죽은 나무는 작은 힘만 가하여도 부러지지만 살아있는 나뭇가지는 구부러뜨려도 부러지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피하려고 했습니다. 십자가를 피하시려고 했습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 말씀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왜 피하려고 하셨는가에 관해서 좀 더 자세하게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눅22:42 가라사대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내가 왜 십자가를 져야 합니까?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악당들에게 붙들려가기 직전에 예수님이 기도하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이런 기도를 하지 않았다면 예수님은 인류의 구세주가 될 수 없었습니다. 어떻게 예수님을 믿는 순교자들도 주를 위해서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목숨을 바쳤는데 예수님 자신은 어찌하여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렇게 기도할 수가 있겠습니까? 너무나 그 기도가 연약하니까 하늘에서 힘을 불어 넣어 주었습니다.
힘을 불어 넣어 주지 않았다면 주님께서 인류 구원을 위한 그 마지막 기도를 못하였을 지도 모릅니다.
눅22:43 사자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돕더라
예수님의 자력으로는 십자가를 이길 수 있는 힘이 준비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하늘에서 힘을 줌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실 수 있는 능력을 가질 수 있었다는 것을 깨닫기 원합니다. 참 대단한 말씀입니다.
내가 믿음 없는 소리 한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것은 말씀이 하나님이라고 하였으므로(요1:1) 기록된 말씀을 믿어야 합니다.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들이 예수 믿어서 천당 가려고 합니다. 믿으면 천당, 안 믿으면 지옥이라고 말을 합니다. 병들어 죽어가는 목사님한테 “천국이 더 좋습니까? 이 세상이 더 좋습니까?” 물어보면 천국이 더 좋다고 합니다.
“그러면 지금 병세로 봐서 삼일 안에 돌아가십니다. 준비하십시오. 그러나 한 가지 십년이상 살 수가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한 이천만 원이면 십년을 더 살 수 있는 주사약이 나왔는데 집 팔아서 이천만 원 들여 십년 더 사시다 가시렵니까? 아니면 삼일 안에 천국에 가시렵니까?” 물어보면 “아니 그런 게 있어요? 그런 것이 있다면 집을 팔아서라도 약을 먹고 살아야지요.” 이미 목사님은 거짓말을 했습니다.
천당이 더 좋다면 천당 길을 택해야 되는데 이천만원 주면 십년 더 살 수 있다고 하니까 거기에 눈이 번쩍 뜨여 이 세상에 더 살려고 합니까? 앞 뒤가 말이 맞지 않습니다.
그래서 기도원에 가보면 병들어 있는 많은 목사님들과 장로님들 모두가 천당에 가지 않으려 기도합니다. “하나님, 이 생명 살려 주신다면 주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겠습니다. 좀 더 살다가게 해 주십시오.” 라고 기도를 합니다. 목사님이 그런 기도를 하니까 장로님, 권사님, 집사님도 그런 기도를 합니다.
천국이 더 좋은지 이 세상이 더 좋은지 물으면 천국이 더 좋다고 확신을 가지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없는 사람들은 하늘로부터 소망을 받지 못해서 입니다. 보증을 받지 못한 까닭입니다. 이런 입장에서 본다면 참 이 세상이 얼마나 좋다 하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저도 영생의 말씀을 외치고 있지만 아침에 자고 눈을 뜨면 “하나님, 이런 새로운 세상을 저한테 주셔서 오늘 밝은 태양을 볼 수 있게 하여 주시고 해지는 노을도 보게 하여 주시니 감사합니다.” 이렇게 기도해야 할 줄 믿습니다.
오늘 여러분이 건강한 몸으로 교회에 나온 그 자체가 얼마나 행복입니까? 교회 오고 싶어도 못나오고 병원에 누워있는 사람을 생각하면 여러분에게 건강 주신 것이 얼마나 행복합니까? 저도 이십 대에는 형님 노릇하려고 나이 많게 보이려 하다가 삼십 대, 사십 대 넘어서 어떻게 하면 좀 더 젊어 보일까 하는데 젊음 그 자체의 아름다움이 나이 많은 노인이 얼굴에 화장한 것과 족히 비교할 수 없는 아름다운 재산입니다.
증거할 말씀은 ‘예수의 고난과 승리’라고 했는데 예수님이 살아계셨을 때도 말할 수 없는 고난으로 핍박과 환난을 받았으며 맨발로 쫓기는 신세가 되었는데 이제 십자가 달려서 죽으려고 하니까, 예수님도 인성을 가지신지라 “하나님, 내가 십자가를 지어야 당연하겠지만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내게서 면케하여 주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이렇게 기도 했습니다.
그때에 하늘에서 천사가 내려와서 예수에게 힘을 돕더라(눅22:43) 함으로 예수가 그 힘을 받아서 기도할 때에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어 땅에 떨어졌다고 했습니다.
눅22:44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 방울같이 되더라
아무리 기도를 한다고 해도 땀방울이 핏방울 될리는 없습니다. 땀방울이 핏방울이 될 수 있는 기도는 피나게 기도를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만 인류의 구원을 위해서 이처럼 애쓰며 기도하셨다고 하는 것을 생각할 때에 여러분은 주님 앞에 감사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께서 변화산상에서 모세와 엘리야를 만났습니다. 무엇 때문에 만나서 무슨 대화를 했는가 하고 문의해 보면 대부분 목사님들이 알지 못합니다. 살아계신 예수님은 천오백여 년 전에 죽은 모세와 천년 전에 죽은 엘리야와 무슨 대화를 했는지 보시겠습니다. 이 말씀이 오늘 주님의 고난과 연결되기 때문에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마17:1~4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저희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로 더불어 말씀하는 것이 저희에게 보이거늘 베드로가 예수께 여짜와 가로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주께서 만일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
왜 예수님의 얼굴이 빛과 같이 희어지고 형체가 바뀌어졌는지, 모세는 천오백여 년 전에 죽은 사람이고 엘리야는 천 년 전에 죽은 사람입니다. 곧 이 말씀은 우리말로 말하면 죽은 영인(靈人)들을 만난 것 아닙니까?
변화산상에서 모세와 엘리야를 만났는데 왜 하필이면 모세와 엘리야를 만나야 될 이유가 있습니까? 조상 노아를 만나던지 또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만나던지 하지 왜 모세와 엘리야를 만났느냐, 이때는 곧 얼마 후면 예수님이 십자가 달리실 때가 되어서 십자가에 관한 자신의 운명에 대해서 의논을 하려고 모세와 엘리야를 부른 것입니다(눅9:28~30). 예수님이 자기 운명이 걱정되지 않았다면 모세와 엘리야를 만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영인을 만날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이 영인(靈人)들과 같이 변화체가 되어야 영인을 만날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영인들을 만나기 위하여 얼굴이 해같이 빛나고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평범한 사람이 죽은 사람을 어떻게 만납니까? 모세와 엘리야를 만나서 어떠한 대화를 하였는지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무슨 대화를 했는지 보시겠습니다.
눅9:28~29 이 말씀을 하신 후 팔 일쯤 되어 예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시고 기도하시러 산에 올라가사 기도하실 때에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나더라
변화산상에서 얼굴의 모양이 바뀌었으니까, 예수님이 오실 때도 육체의 예수가 아닌 얼굴이 다른 모양으로 바뀔 줄로 믿습니다.
눅9:30~31 문득 두 사람이 예수와 함께 말하니 이는 모세와 엘리야라 영광 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씀할쌔
예수님이 모세와 엘리야를 만나서 별세하실 것을 말씀하기 위해서 모세와 엘리야를 부른 것입니다. 예수님이 죽었다가 삼일 만에 그대로 살아날 것이라면 걱정할 필요가 없이 모세와 엘리야를 부를 필요가 없고 만날 필요도 없는데 왜 불렀겠습니까? 예수님이 말씀하시길 “온 천하를 얻고도 네 생명 하나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고 하셨습니다(마16:26).
여러분이 이 땅 위에 태어날 때 몇 대 일로 태어난 줄 아십니까?「2억 대 1」로 태어난 것입니다. 이미 여러분은「2억 대 1」이라는 기적을 이룬 것입니다. 이억 명 중에 한 명이라고 생각해 보세요. 얼마나 존귀한 몸인가!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지구상에서 똑같이 닮은 사람은 쌍둥이 외에 단 한명도 없습니다.
지금 여러분의 얼굴 모양은 잘 생겼든지 못 생겼든지 간에 전 세계에서 하나 밖에 없는 아주 존귀하고 귀한 얼굴을 가진 줄로 믿습니다. 비록 얼굴이 어떻게 되고 코가 어떻게 되었더라도 그렇게 잘 생긴 사람은 이 지구상에 여러분 한 사람 뿐입니다. 정말 귀하다는 것을 깨닫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이 만들어주신 얼굴인데 그 보다 더 멋있는 얼굴이 또 어디 있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이 보실 때는 못생긴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변화산상에 나타난 예수님도 자기의 죽음에 관해서 염려하고 걱정했습니다.
성경의 근본인 인간의 죽음과 삶에 관해서 다 말할 수 없지만, 오늘 우리 주님의 고난을 생각해 볼 때 그 십자가에 달리실 때에 “아버지여! 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내게서 면케하여 주시옵소서” 라고 기도를 하신 것은 예수님도 인간이므로 연약합니다. 저도 인간이기에 연약합니다.
여러분이 보실 때는 목사님은 강인하고 대단하시며 성경도 입에서 자동으로 척척 나온다고 하시겠지만 제 개인적으로 생각하면 저도 굉장히 연약한 사람이라 생각합니다.
예수님이 “아버지여 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내게서 면케 하여 주시옵소서.” 라고 기도를 하시고 마태복음 27장 46절에 보시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라고 하셨습니다.
마27:46 제 구시 즈음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질러 가라사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어떻게 인류의 구세주 되신 예수님이 이런 기도를 하실 수 있을까요? 예수님은 인성을 가지신 연약한 분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본체로 오셨지만 그 육신은 우리 인생과 같이 연약함을 가지고 오셨기 때문에(사 53:2) 우리의 연약함을 주님께서 친히 아신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구세주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예수님이 얼마나 죽음에 대한 고난과 고통을 표현 하셨습니까? 그 고난과 고통은 바로 우리의 고난과 고통입니다. 마가복음에 예수님의 마지막 장면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막14:35~36 조금 나아가사 땅에 엎드리어 될 수 있는 대로 이 때가 자기에게서 지나가기를 구하여 가라사대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기록된 말씀과 같이 예수님은 자기의 몸을 하나님 앞에 맡긴 것입니다. 각오를 하신 것입니다. 변화산상에서 모세와 엘리야를 만나서 확신을 받은 것입니다.
모세는 “내가 누굽니까? 바로 걱정 말고 십자가 지십시오. 주님의 시체는 아무가 볼 수 없도록 없어집니다.” 이는 주님은 죽지 않고 부활하시기 때문이라고 말을 하였을 것입니다. 이에 엘리야가 예수님에 대하여 하는 말이 “내가 누굽니까? 나는 하늘로 승천하여 올라간 사람이 아닙니까? 그리고 다시 올 것을 말라기 4장 5절에 예언된 엘리야가 아닙니까. 우리 주님께서는 걱정 말고 십자가 지십시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저 엘리야처럼 하늘로 승천할 것입니다. 그리고 엘리야와 같이(말4:5) 재림하게 되실 것입니다.” 라고 알려주었을 것입니다.
왜 예수님께서 엘리야와 모세를 만났는지, 무슨 대화를 하셨는지 지금까지는 이 비밀을 몰랐습니다. 그러나 오늘 이 말씀을 들으심으로 말미암아 예수님께서는 모세와 엘리야만을 만나야 될 이유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모세와 엘리야와 ‘별세’에 대한 대화를 통하여 부활의 확신을 가지고 당당하게 십자가를 지신 줄 믿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들이 죽는 날을 모르게 하신 것이 우리 모두가 행복이라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사람이 내일 모레 친척집 가다가 교통사고 나서 죽는 줄 안다면 얼마나 괴롭겠습니까? 개판치고 온갖 못된 짓하고 총 쏘고 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죽음을 모른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연세가 많으면 기억력이 없어져서 잘 잊어버리는데 기억력 없는 것이 큰 행복입니다. 왜냐하면 미운 놈들 다 잊어버리고 돈 떼어 먹은 놈들 다 잊어버리는 것이 행복으로 오는 것입니다. 생전의 모든 일들의 기억이 팔팔하게 다 살아 있으면 자기 성질에 스트레스가 쌓여서 더 오래 살지 못할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용서하라고 한 것입니다. 나이가 들어 기억력이 없어지는 것도 용서의 한 방법일 것입니다.
막14:37 돌아오사 제자들의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시몬아 자느냐 네가 한시 동안도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이렇게 예수님이 기도하러 가시기 전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했습니다. “내가 잠시 돌을 던지면 떨어질 곳에 기도를 할테니까(눅22:41) 너희는 나를 위해서 기도 좀 해주라. 내가 지금 죽을 지경이다.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마26:38)”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이 심히 고통스러워서 말할 수 없다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그 마음도 한번 보시겠습니다.
막14:33~34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가실쌔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사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 하시고
몇 시간 후면 예수님이 악당들에게 붙들려가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것을 미리 알고 계시니 얼마나 고통스럽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막14:34~35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 하시고 조금 나아가사 땅에 엎드리어 될 수 있는 대로 이 때가 자기에게서 지나가기를 구하여
마음이 너무 통회하심으로 죽게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런 고통이 온 인류의 고통이요, 인류의 고통을 대신(代身)하기 위한 예수님의 마음의 고통입니다. 세상에서 제일 큰 고통은 마음의 고통입니다. 마음의 고통을 덜어주는 진리가 있어야 우리가 하나님 앞에 바로 세움을 입을 수 있는 축복의 자녀가 된다는 것을 깨닫기를 원합니다.
막14:36~37 가라사대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돌아오사 제자들의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시몬아 자느냐 네가 한시 동안도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자기 선생은 죽을 지경이 되어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하고 있는데 제자들은 코를 드르렁 골며 쿨쿨 자고 있었습니다. 아마 저녁에 만찬에서 배불리 많이 먹었나 봅니다. 예수님은 죽으려고 하니 밥이 가시 같아서 넘어가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제가 6.25때 본 것인데 서울에서 내려온 경찰들이 인민군에게 협조한 사람들을 묶어 식당으로 데리고 가서 마지막 아침밥을 잘 차려 먹여서 불과 몇 시간 후에 죽이려고 하는데 본인한테는 죽인다고 말을 하지 않습니다. 제가 그것을 여러 번 봤습니다. 식당에서 밥을 먹는데 고깃국에다 밥상을 잘 차려주니까 곧 죽을 자들은 아무 것도 모르는 채 주인 아주머니에게 “참 잘 먹었습니다”하며 인사하고 가는 사람들을 보고 주인 아주머니가 “오늘 잘 먹여 주는 걸 보니까 저 사람들을 죽이려는 모양이죠?”하였습니다.
그리고 두 시간 쯤 있다 산에서 총소리가 빵빵 나더라구요. 그 식당에 사람을 데리고 오면 아침에 밥을 잘 먹여가지고 재판도 없이 뒷산에 데리고 가서 죽였습니다. 6.25때 이렇게 많은 사람을 재판 없이 그냥 죽었던 것입니다.
우리 마을에 미처 피난가지 못한 경찰 가족의 손자 어린 아이를 인민군들이 죽였습니다. 그래서 전쟁이 일어나면 억울하게 사람이 많이 죽습니다. 남북 전쟁은 어떤 경우라도 일어나지 않도록 노력을 해야 됩니다.
예수님이 죽을 지경이 됐는데 제자들은 편안하게 코를 골며 잠을 잤습니다. 제자들이 이 모양이니 예수님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겠습니까?
막14:37 돌아오사 제자들의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시몬아 자느냐 네가 한시 동안도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이렇게 책망하시고 또 기도하러 가셨습니다.
막14:38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이는 잠에 미친 자들입니다. 예수님이 한번 말했으면 됐지, 여러분들 같으면 세 번씩 제자들에게 “죽게 되었으니 기도해 달라”고 부탁하였는데도 잠시도 깨어 있지 못하여 잠을 잘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성령을 받기 전에는 믿음이 없던 자들입니다.
막14:40~42 다시 오사 보신즉 저희가 자니 이는 저희 눈이 심히 피곤함이라 저희가 예수께 무엇으로 대답할 줄을 알지 못하더라 세 번째 오사 저희에게 이르시되 이제는 자고 쉬라 그만이다 때가 왔도다 보라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우느니라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
“이제는 너희들이 나를 위해 기도해 줄 시간이 없다. 한시도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예수님의 이러한 긴박한 상황을 읽을 때에 저는 가슴이 아주 찡합니다.
지금은 제가 눈물이 나지 않습니다만 예전에는 예수님의 겟세마네동산 기도를 생각만하면 진짜 눈물이 많이 나왔습니다. 왜 눈물을 흘렀냐면 자기 아버지가 악당들에게 붙들려가서 매를 맞는 것을 보는 아들의 입장에서 눈물이 안 나온다면 그게 자식이냐는 것입니다. 자식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면서 눈물이 났습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생사의 갈림길에서 기도하셨는데 제자들은 잠보들이었습니다. 변화산상에 있었을 때도 제자들이 잠을 얼마나 잤는지 저들이 하는 말이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님을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짓겠습니다.” 라고 말을 해 놓고 자기들이 하는 말이 무슨 말인지도 알지 못하고 초막 셋을 짓겠다고 미친 소리를 했습니다(눅9:33).
누가복음 9장 28절을 잘 보시면 예수님과 제자들의 관계를 알 수가 있고 또한 예수님의 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눅9:28~33 이 말씀을 하신 후 팔 일쯤 되어 예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시고 기도하시러 산에 올라가사 기도하실 때에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나더라 문득 두 사람이 예수와 함께 말하니 이는 모세와 엘리야라 영광 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씀할쌔 베드로와 및 함께 있는 자들이 곤하여 졸다가 아주 깨어 예수의 영광과 및 함께 선 두 사람을 보더니 두 사람이 떠날 때에 베드로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하되 자기의 하는 말을 자기도 알지 못하더라
자기의 하는 말을 자기도 알지 못하면서 어떻게 초막을 셋이나 짓겠습니까? 제자들이 거짓말 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초막에 계실 분이 아니고 성전에 계실 분입니다. 잠자다가 헛소리를 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긴박한 상황에도 잠을 자고 마지막 십자가에 달리기 직전에 “내가 죽을 지경이 되었다. 나를 위해서 기도 좀 해 달라”고 세 차례 부탁을 해도 제자들은 잠을 잤습니다.
육신적으로도 잠이 많은 사람은 이 세상에서 아무것도 성공할 수 없습니다. 남 일할 때 일하고 남 잠잘 때 잠자는 사람 치고 성공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남들이 일할 때 일하고 남들이 잠잘 때 깨어 먼저 일어나서 일하는 사람이 반드시 성공할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은 이와 같이 죽음 앞에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하며 자기 버리심을 한탄했습니다. 저도 그럴 때가 많았습니다. 어렵고 힘들고 고통이 많았을 때 이 사명을 감당하면서도 저에게 큰 환난이 많았는데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내가 왜 이 지경이 되어야 합니까” 할 때가 많았는데 여러분들은 얼마나 많겠습니까? 그러나 그런 것을 다 이기는 자가 세상을 이기는 자인 줄로 믿습니다.
자기하고 싶은 것 다하고 자기 놀고 싶은 것 다 놀고 하나님 뜻을 이루려 하면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자가(마7:21) 될 수 없습니다.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덜하고 자기가 갖고 싶은 것을 덜 갖고 자기가 갖고 싶은 것을 하나님 앞에 드리는 이런 은혜가 있을 때 하나님이 복을 주실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 앞에는 아무것도 드리지 않고 복 받기만 구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아버지께서 절대로 축복해 주시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의 십자가는 저주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하기 위하여 저주의 십자가에서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셨습니다.
갈3: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예수님은 우리를 대신해서 나무에 달려 저주를 받았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해서 율법에 의한 저주를 받았기 때문에 우리를 대신 하였습니다. 우리는 율법의 저주에서 구원 받은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율법 때문에 저주 받을 일이 없습니다. 이것을 하나님 앞에 감사해야 됩니다.
에베소서 2장 15절 말씀에 보게 되면 예수님이 인류의 죄를 대속하는 십자가하고 저주의 율법하고 바꿔치기 했습니다.
엡2:15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십계명)으로 예수 십자가의 육체를 폐하셨다고 하였습니다. 죄 되게 하는 것이 율법인데 예수님이 자기의 십자가로서 율법을 폐하신 것입니다. 모든 믿는 자의 의를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셨다고 하였습니다(롬10:4).
엡2:16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십자가를 지심으로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막혔던 담이 다 무너지고 화목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의 십자가는 화목제물입니다.
엡2:16~17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죄인으로 하나님 앞에 나갈 사람이 아무도 없는데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심으로 율법의 저주에서 범죄한 우리를 위하여 만 인류를 대신하여 저주를 받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율법에서 구원함을 받고 죄에서 해방함을 받아(롬8:1~3)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축복을 받은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의 땀방울이 핏방울 되도록 그 피나는 고통 속에서 우리에게 죄와 벌을 해결하여 주시고 죄의 근원이 되는 율법을 폐하시므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축복을 받게 된 줄로 믿습니다.
자나 깨나 앉으나 서나 하나님 앞에 감사하고, 주님 앞에 감사하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한 고난의 승리로 우리는 주님과 같이 십자가의 고난을 받지 않고도 승리자가 되었습니다(요일5:4~5). 이로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의 공로로서 이긴 자가 되어가는 것입니다. 십자가로 승리하신 우리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영원토록 찬양하는 존귀한 자들로 축복되시기를 예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