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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한 장이 세상을 바꿀 수 있는가 : 세상을 바꾼 사진들


시리아 난민 세살배기 아일란 셰누(Aylan Shenu)의 사진은 순식간에 중동 지역의 난민, 인권 문제를 부각시키는 중요한 사진이 되었다. 터키 민영뉴스통신사인 도안통신의 여성 사진기자 닐류페르 데미르가 촬영한 이 사진은 소셜미디어로 공유되고, AP통신에 의해 전세계 언론에 보도되며 시리아 난민 인권 문제의 상징이 됐다. 이 사진으로 독일 메르켈 총리가 전격적인 난민 수용 의지를 밝히는 등 유럽의 난민 정책 변화를 가져왔다.

사진 한 장은 이처럼 세상을 바꾸는 강력한 무기가 될 수 있다. 역사적 현장을 생생하게 증언하는데 사진만큼 효과적인 수단은 없다. 동영상이 사진보다 더 생생할 수 있을 지는 몰라도 사진만큼 강렬한 힘을 발휘하지는 못한다. 프랑스의 비평가 롤랑 바르트는 ‘사진의 힘은 멈춰서서 계속 보게 하는데서 나온다’고 했고, 미국의 사진작가 알프레드 스티글리츠는 ‘사진 속에 현실이 있고, 사진은 때때로 현실보다 더 불가사의한 힘을 지닌다’고 했다.

아일란 셰누의 사진처럼 세상을 바꾼 역사 속 사진은 또 무엇이 있을까?

 

1. 베트남전의 울부짖는 소녀

1972년 6월 8일, AP통신의 사진기자인 베트남 출신 닉 우트(Nick Ut)는 발가벗은 채 울부짖으며 트랑 방 마을 거리를 달리는 9살난 여자 아이 킴 푹(Kim Phuc)을 카메라에 담았다. 남베트남 군용기 두 대가 자국민이 모여 있던 지역을 네이팜탄으로 오인 폭격한 순간이 아이의 표정에 그대로 드러난 이 사진은 뉴욕타임즈 1면에 실리면서 역사를 바꾼 사진이 됐다. 이 사진이 전세계에 알려지며 반전 여론이 고조됐던 것이다.

베트남전이 어떻게 끝났는지 사람들은 잘 알지 못하지만 이 사진은 사실상 베트남전을 끝낸 사진으로 역사에 남았다. 닉 우트는 이 사진으로 1973년 퓰리처상을 수상했고, 전신화상을 치료하기 위해 17차례나 수술을 받아야 했던 킴 푹은 베트남전의 참상을 고발하는 아이콘으로 남았다.

 

2. 남수단에서 독수리의 위협에 처한 꼬마

1993년 뉴욕타임즈의 사진기자이자 보도사진가 케빈 카터는 남수단에서 우연히 이 사진을 찍었다. 엄마와 함께 걸어가던 아이가 잠깐 엄마와 떨어져 있었는데 그 사이 독수리가 날아와 뒤에 앉아 있다가 곧바로 날아갔다고 한다. 카터가 사진을 찍은 것은 바로 그 찰나의 순간이었다. 이 사진은 뉴욕타임즈에 보도되면서 ‘아프리카의 절망’을 알리는 상징으로 역사에 남았다.

카터는 1994년 퓰리처상을 수상했지만, 사진 속 뼈가 앙상한 아이와 그를 노려보는 독수리의 끔찍한 구도에 충격받은 사람들은 그에게 셔터를 누를 것이 아니라 아이를 구했어야 했다고 비난을 퍼부었다. 결국 카터는 사진이 신문에 실린지 3개월 만에 자살했다. 사진 한 장이 아프리카에 대한 인식을 바꾸고, 또 사진기자의 인생을 끝낸 이 비극적 사건은 영화 <뱅뱅클럽>으로 제작되기도 했다.

 

3. 이오지마에서 성조기 게양하는 미국 해병대

1945년 2월 23일, 사진작가 호세 로젠탈은 일본 이오지마 섬의 수리바치산에서 성조기를 게양하는 미국 해병대원들을 카메라에 담았다. 나중에 조작 논란이 일기도 했지만 로젠탈은 전투가 끝나고 다섯 명의 해병대원이 성조기를 들어올리려 할 때 미리 구도를 잡아놓고 허겁지겁 산으로 올라갔다고 해명했다. 그는 이런 말을 남겼다. “행운은 준비된 사람에게만 찾아온다.”

이 사진은 미국의 제2차 세계대전 승리의 상징으로 수많은 미디어에 인용되며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이미지로 남았다. 1950년엔 존 웨인 주연의 <이오지마의 모래>라는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4. 구정 대공세로 베트콩 즉결처형

1968년 1월 30일, 구정 즉, 설날을 노려 베트남 인민군이 남베트남과 미군을 상대로 공습을 개시한 ‘구정 대공세’로 미국에선 반전 여론이 거세게 일기 시작했다. 당시 미국인들은 전쟁이 거의 끝난 줄 알고 있었는데 미국 대사관이 베트콩에게 점령당하면서 여론이 뒤바뀐 것이다.

이 사진은 AP통신의 종군기자 에디 아담스가 당시 사이공(호치민)에서 남베트남 경찰간부 은구옌 은곡이 베트콩 한 명을 권총으로 즉결처형하는 장면을 찍은 것이다. 퓰리처상을 받은 이 사진이 반전 여론에도 방아쇠를 당기면서 미국은 베트남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진퇴양난에 빠지게 됐다.

 

5. 인류 최초의 달 착륙

1969년 7월 20일, 아폴로 11호의 버즈 올드린과 닐 암스트롱이 달에 착륙했다. 우주인의 헬멧에 사진을 찍고 있는 올드린의 모습이 보인다. 사진이 찍히기 19분 전 암스트롱은 달에 첫 발을 내디디며 “하나의 작은 발자국이 인류에겐 커다란 도약”이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6. 종전 기념 키스하는 타임스퀘어의 연인

1945년 8월 14일, 일본이 항복하며 제2차 세계대전은 끝이 났다. 미국 뉴욕시의 타임스퀘어에서는 전승 축하 행진이 열렸고, 사진가 알프레드 아이젠슈타트는 귀국한 해군 병사와 그의 연인이 열정적인 키스를 하는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이 사진은 전쟁이 끝나고 새로운 시대가 시작된다는 상징처럼 알려져 있다. 훗날 자신이 사진 속 주인공이라고 주장하는 커플들이 많이 나타나 화제가 되기도 했는데 실제 두 사람이 연인 사이가 아니었다는 증언도 있어 조작 논란이 일기도 한 사진이다.

 

7. 크메르 루즈의 킬링필드 만행

1975년부터 1979년 사이 캄보디아의 폴 포트가 이끌던 크메르 루즈는 정권을 잡은 뒤 전국에서 130만~200만명의 양민을 학살했다. 당시 캄보디아 인구가 600만명이었으니 엄청난 인구가 살해당한 것이다. 특히 교육받은 엘리트들, 기업인, 부유층, 구 정권 관계자 등을 노동수용소에 가두어 고문하고, 강간한 뒤 무차별 살해했다.

크메르 루즈가 프놈펜에서 정권을 잡을 수 있던 것은 베트남전쟁 당시 미국이 베트남 국경지대의 캄보디아인들을 무차별 학살해 반미 감정이 높았기 때문입니다. 프놈펜 외곽에 시신이 산더미처럼 쌓여 당시 이곳에는 ‘킬링 필드’라는 별칭이 붙었다. 1979년 베트남 연합군에 의해 크메르 루즈가 축출됐지만 폴 포트가 법정에 서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다.

이 사진은 킬링 필드의 잔혹함을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됐고, 1984년엔 롤랑 조페 감독에 의해 <킬링 필드>라는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8. 중국 텐안먼 광장의 탱크맨

1989년 6월 5일, AP통신의 사진기자 제프 와이드너는 중국 비밀경찰들의 눈을 피해 텐안먼 광장이 잘 보이는 호텔 6층 객실 발코니에 카메라를 들고 서 있었다. 탱크들이 줄지어 이동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한 청년이 쇼핑백을 들고 천천히 걸어오더니 탱크를 가로막고 섰습니다. 굉음을 내며 질주하던 4대의 탱크는 그의 앞에 멈춰 섰다. 팽팽한 긴장감이 흐르는 그 순간을 와이드너는 카메라에 담았다. 그는 필름을 함께 있던 유학생을 통해 AP통신으로 보냈고, 일명 ‘탱크맨(Tank Man)’으로 이름 붙은 이 사진은 텐안먼 민주화 시위를 전세계에 알렸다. ‘탱크맨’은 지금도 국가폭력에 대한 저항을 이야기하는 상징적인 단어로 쓰이고 있다.

 

9. 비아프라 전쟁 중 영양실조에 걸린 아이

1969년 나이지리아 동부 비아프라에서 종군 사진기자 돈 맥컬린이 촬영한 이 사진은 비아프라의 실상을 알리는 기폭제가 됐다. 1967년 비아프라가 독립선언을 하자 나이지리아는 곧바로 봉쇄 조치를 단행하고 비아프라를 침공했다. 3년 동안의 전쟁으로 100만명이 죽었는데 이들은 대부분 기아와 기근에 의한 사망자다. 사진 속에서 영양실조에 걸린 아이의 모습이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데 캠프 한 곳에 900명이나 되는 아이들이 이런 식으로 살고 있는 모습에 맥컬린은 기겁을 하고 아이들의 모습을 사진으로 남겨 실상을 고발했다. 이 사진으로 국제 사회는 전쟁 중재에 착수하게 됐다.

 

10. 레닌 옆 사라진 트로츠키

1920년 5월 1일, 사진작가 G. P. 골드스타인은 소련 모스크바의 노동절 행사에서 블라디미르 레닌이 연설하는 모습을 촬영했다. 인류 최초의 공산국가의 탄생을 알리는 사진이었으나 이 사진이 전세계적으로 유명해진 것은 스탈린이 집권한 후 사진에 있던 트로츠키를 지워버렸기 때문이다. 위 사진에는 레닌의 오른쪽에 트로츠키가 서 있는 모습이 보이지만, 아래 사진에는 트로츠키가 없다.

 

에이즈 환자 손잡은 다이애나 왕세자비

1992년 7월 영국 다이애나 왕세자비가 런던 에이즈 센터를 방문해 환자 윌리암 드레이크의 손을 잡는 장면이다. 에이즈에 대한 공포가 만연했던 1990년대 초 이를 불식시키는 계기가 된 사진 중 하나다.

 

홀로코스트 생체실험 의사

홀로코스트 기간 나치 캠프에서 생체실험을 한 의사 프리츠 클라인이 1945년 4월 베르젠-벨젠 지역이 해방된 뒤 시신들 사이에 서 있는 장면이다. 2만8000명이 살해된 현장을 담은 이 사진은 영국인 병사가 촬영했다. 클라인은 여기서 시신을 매장하라는 명령을 받았고 뒤에서 영국 병사가 지켜보고 있었다. 클라인은 결국 사형 선고를 받고 처형됐다. 이 지역은 연합군에 의해 가장 먼저 해방된 지역으로 이 사진은 홀로코스트 만행을 전세계에 알린 첫 번째 사진으로 남았다.

 

어느 스페인 병사의 죽음

1936년 스페인 내전 당시 로버트 카파가 촬영한 사진이다. 파시스트 프랑코에 맞서 싸운 공화파 알코이 민병대원 페데레코 보렐 가르시아의 전사장면이 담긴 이 사진은 스페인 내전을 대표하는 사진으로 남았다. 카파는 “만약 당신의 사진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그것은 당신이 충분히 다가가지 않았기 때문이다”라는 명언을 남겼다. 종군기자로 전장을 누비던 카파는 잉그리드 버그만의 연인으로 할리우드에서 일하기도 했고, 보도사진작가 그룹 ‘매그넘’을 설립하기도 했는데, 1954년 인도차이나 전쟁 막바지에 프랑스군을 취재하다 지뢰를 밟아 숨을 거두었다.

 

탄광촌에서 일하는 아이들

1910년 루이스 하인은 카메라를 들고 아동노동 착취 현장을 찾아갔다. 200만명이 넘는 아이들이 학교에 가지 않고 이처럼 노동을 하고 있었다. 이 사진은 루즈벨트 정부가 아이들의 노동을 금지시키는 법을 만들 때 큰 역할을 했다.

 

나이키 축구공을 꿰매는 파키스탄 소년

1996년 12살난 파키스탄 소년이 축구공을 꿰매는 사진이 라이프 잡지에 실렸다. 빈국의 아동 노동을 고발한 이 사진은 나이키 불매운동으로 이어졌다.

 

이주 노동자의 어머니

1936년 미국 사진작가 도로시아 랭은 미국 전역을 돌아다니며 미국인들의 사진을 찍던 중 굶주린 아이 7명을 키우고 있는 32살 플로렌스 오웬 톰슨의 사진을 찍게 됐다. 그녀는 새를 잡아 먹고, 음식을 사기 위해 자동차 타이어를 팔아야 할만큼 가난에 고통받고 있었다. 도로시아는 사진을 샌프란시스코 뉴스에 보냈고, 이 사진 덕분에 이주 노동자 수용소에 식료품이 몰려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