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오리라 한 엘리야
본문말씀 : 마태복음 11장 10~14절
기록된 바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저가 네 길을 네 앞에 예비하리라 하신 것이 이 사람에 대한 말씀이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모든 선지자와 및 율법의 예언한 것이 요한까지니 만일 너희가 즐겨 받을찐대 오리라 한 엘리야가 곧 이 사람이니라
성경에 예언되어 있는 사람을 만났다는 것은 신(神)을 만난 것과 같이 대단한 행복과 축복을 받은 자들만이 성경에 예언된 사람을 만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리라 한 엘리야에 관해서는 성경에 할 말이 상당히 많습니다. 사람이 성경을 안다는 것은 신을 안다는 것과도 같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말씀이 하나님이라고(요1:1)하였고 또한 예수님이라고(요5:39)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을 안다는 것과 같고 성경을 모른다는 것은 하나님을 모른다는 것과 같습니다. 이 말씀을 여러분들이 잘 듣고 오리라 한 엘리야에 대한 비밀의 말씀을 깨우침 받는 지혜자가 되시기를 원합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보다 6개월 먼저 태어난 자입니다(눅1:36). 세례 요한은 이 땅 위에 오신 메시아에게 감히 세례를 준 자입니다(마3:15). 그때에는 세례 요한도 너무나 감동을 받고 놀라서 세례 줄 것을 거절했습니다.
마3:15~17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신대 이에 요한이 허락하는지라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 오실쌔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처음에는 예수님께서 요한에게 세례를 허락하라고 하자 요한이 말하기를 “내가 당신에게 세례를 받아야 되는데 세례를 줄 수가 없습니다.” 할 때에 예수님께서 허락하라고 말씀하시고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과 세례 요한은 만나게 됩니다.
이러한 세례 요한에 대하여 요한 자신은 어떻게 말을 했는가 하면 “나는 물로써 세례를 주지만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들메 들기도 감당치 못할 것이다(마3:11)” 라고 말씀을 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예언한 것이 불과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이가 키를 들고 자기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을 모아 곳간에 들이시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고 했습니다(마3:12).
키라는 것은 알곡과 쭉정이를 가리는 농기구로서 키를 들고 돌려서 치면 알곡은 벼로부터 떨어져 나가고 그것을 다시 풍구에 부치면 쭉정이는 날아가고 알곡은 남게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알곡과 쭉정이를 가리는 이러한 일을 행하신 적이 없습니다. 알곡은 모아 곳간에 넣고 쭉정이는 불에 던지는 일을 예수님이 행하신 사실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예언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살아있는 증거인 것을 깨닫기를 원합니다. 마지막 때에 하나님께서 알곡과 쭉정이를 구별해서 불에 태우게 될 것입니다(마13:49~50).
마13:24~30 예수께서 그들 앞에 또 비유를 베풀어 가라사대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 사람들이 잘 때에 그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더니 싹이 나고 결실할 때에 가라지도 보이거늘 집주인의 종들이 와서 말하되 주여 밭에 좋은 씨를 심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면 가라지가 어디서 생겼나이까 주인이 가로되 원수가 이렇게 하였구나 종들이 말하되 그러면 우리가 가서 이것을 뽑기를 원하시나이까 주인이 가로되 가만 두어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어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숫군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불에 집어 던져 넣으리라고 했습니다. 이 역사는 마지막 심판 때의 일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사야 55장 11절에 보시면 하나님의 입에서 나간 하나님의 말씀은 헛되이 하나님께로 돌아가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하나님이 명하여 보낸 일에 형통하리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세례 요한 때와 예수님 때에 일어난 사건들 중에는 아직까지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많습니다. 우선 세례 요한이 이 땅에 온 것은 무슨 사명을 가지고 왔는지 성경을 통해 보시겠습니다.
눅3:4 선지자 이사야의 책에 쓴 바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는 주의 길을 평탄케 하라는 예언을 했습니다. 길이 높고 울퉁불퉁하면 그 길을 잘 닦아서 편히 갈 수 있도록 메시야의 길을 잘 닦아 주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도로에 평탄작업을 하여 준다는 것입니다. 제가 오늘 말씀 드리고자 하는 것은 세례 요한에 대한 예언이 다 이루어지지 아니하고 아직도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마3:1~3 그 때에 세례 요한이 이르러 유대 광야에서 전파하여 가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하였으니 저는 선지자 이사야로 말씀하신 자라 일렀으되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하였느니라
기록된 말씀과 같이 세례 요한은 마치 불도저로 울퉁불퉁한 험악한 길을 잘 닦아서 평탄한 길을 만드는 것과 같이 주의 길을 평탄케 해야 될 사명을 가지고 왔습니다.
그런데 세례 요한은 예수님의 길을 평탄케 한 사실도 없고, 예수님이 세례 받을 당시에 잠시 성령의 감동으로 예수님에 관해서 세례 요한이 증거를 잘한 사실은 있지만, 예수님께 세례를 베풀고 난 뒤에 요한은 단 한 번도 예수님을 만나 준 사실이 없습니다. 예수님에 대하여 지극히 무관심한 그런 사람이 어떻게 주의 길을 평탄케 할 수 있다고 할 수가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요한은 주의 가는 길이 가시밭길이 아니고 대로의 길이 될 수 있게, 평탄의 길이 될 수 있게 하라는 사명을 받았습니다. 그 자신은 신들메도 감당하지 못할 예수의 제자가 되어 목숨을 걸고 예수를 보필하고 증거 하여 많은 사람을 예수에게로 인도할 사명을 가지고 이 땅에 태어났습니다.
눅1:13~16 천사가 일러 가로되 사가랴여 무서워 말라 너의 간구함이 들린지라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네게 아들을 낳아 주리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 너도 기뻐하고 즐거워할 것이요 많은 사람도 그의 남을 기뻐하리니 이는 저가 주 앞에 큰 자가 되며 포도주나 소주를 마시지 아니하며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이스라엘 자손을 주 곧 저희 하나님께로 많이 돌아오게 하겠음이니라
기록된 말씀과 같이 이스라엘 자손을 주 곧 저희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할 사명을 가진 세례 요한이 예수 만나기를 외면하고 세례 이후 단 한 번도 만나주지 아니함으로서 실상으로 예수님의 가시는 길을 평탄한 길로 만들기는커녕 도리어 상상을 초월하는 가시밭길과 고난과 고통의 십자가의 길로 만든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길이 어떻게 평탄한 길이고 대로라고 볼 수가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대로의 길은 짐승과 사단, 마귀 이러한 것들이 감히 찾아올 수 없는 그런 길이 대로의 길입니다(사35:8). 예를 들어서 고속도로는 대로의 길이고 저 산에 있는 산길과 들길은 환난과 고통의 좁은 길입니다. 대로의 길인 고속도로에 뱀과 사단과 마귀와 사자가 나타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마찬 가지로 예수님이 좁은 길을 가신 것은 예수님의 길을 예비한 자가 없기 때문에 산길, 들길, 가시밭길, 넘어질 수밖에 없는 자갈밭 길을 가신 것입니다.
사40:3~5 외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 하라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작은 산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않은 곳이 평탄케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요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 대저 여호와의 입이 말씀하셨느니라
이사야의 예언은 기록된 말씀과 같이 대로를 평탄케 하고 험한 곳이 평지가 되게 하라고 하였으나 대로의 길을 평탄하게 만들기는커녕 도리어 예수가 메시아인지 아닌지 의심하여 감옥에 있던 세례 요한이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어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라고 질문한 것은 당신이 진짜 입니까? 우리가 다시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라고 문의한 것입니다(마11:2~3).
그러면 대로의 길이 어떤 길인지 맛을 한 번 보고 난 뒤에 세례 요한이 대로의 길을 가게 했는지 한 번 보겠습니다.
사35:8~10 거기 대로가 있어 그 길을 거룩한 길이라 일컫는바 되리니 깨끗지 못한 자는 지나지 못하겠고 오직 구속함을 입은 자들을 위하여 있게 된 것이라 우매한 행인은 그 길을 범치 못할 것이며 거기는 사자가 없고 사나운 짐승이 그리로 올라가지 아니하므로 그것을 만나지 못하겠고 오직 구속함을 얻은 자만 그리로 행할 것이며 여호와의 속량함을 얻은 자들이 돌아오되 노래하며 시온에 이르러 그 머리 위에 영영한 희락을 띠고 기쁨과 즐거움을 얻으리니 슬픔과 탄식이 달아나리로다
기록된 말씀과 같이 이런 길이 대로의 길입니다. 세례 요한이 예수님의 길을 대로의 길로 예비하는 사명자로 왔지만, 요한이 자기 사명을 망각함으로서 대로의 길을 예비하지 못했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신약시대의 처음으로 돋아난 아침 햇살의 빛이라면 세례 요한은 구약시대의 마지막 지는 태양 빛입니다.
지는 해는 힘이 없이 비실비실하고 맥없이 어둠으로 떨어지는 빛입니다. 반면에 아침에 돋는 햇빛은 힘이 세고 강력합니다. 예수님은 돋는 해였고 세례 요한은 지는 해였습니다. 이 두 사람은 만나지 않으면 안 될 필연(必然)의 사람으로서 구약과 신약의 사람이었습니다. 꼭 만나야만 했고, 또 이 두 사람은 육신적으로는 친척지간이었고, 태어나기 전에도 어머니끼리 임신했을 때 서로 만났고, 뱃속에서 서로 기쁨으로 뛰놀았다고 했습니다(눅1:44).
그리고 세례 요한은 아비야 반열에 제사장이라는 명문 집안의 아들로 예수님보다 6개월 먼저 태어났고(눅1:36) 제사장이라는 대단한 권세를 가진 집안에서 학문을 잘 닦은 아들로 자라났습니다. 반면 예수님에 대하여는 “이 사람은 배우지 아니하였거늘 어떻게 글을 아느냐”라고 까지 하는 천대를 받은 자로 태어났습니다(요7:15).
이같이 예수님은 배우지 못한 천한 자로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천하게 태어났던 예수님은 존귀와 영광으로 받들림을 받아야 될 메시아의 입장으로 왔고, 명문 집안에 제사장의 아들로 귀하게 태어난 세례 요한은 천하게 태어난 예수님을 받들며 그 분의 길을 평탄케 하고 길을 예비할 신들메를 멜 수밖에 없는 천한 종으로 태어난 것입니다.
영육(靈肉) 간에 너무나 차이가 나는 상황으로 예수님은 먹을 것이 없어서 제자들과 안식일 날 보리 이삭을 뜯어다가 그것을 서리해서 잡수셨고 세례 요한은 오늘날 이 시대에도 입기 힘든 약대 털옷을 입고 가죽 띠를 매고 아주 값비싼 돌 사이에서 자란 벌꿀인 석청을 먹고 정력제인 메뚜기를 먹으면서 세례 요한은 자칭 그리스도의 길을 예비하는 자로 왔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마3:4~5 이 요한은 약대 털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띠고 음식은 메뚜기와 석청이었더라 이 때에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 강 사방에서 다 그에게 나아와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요단강 지방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다 나와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은 것입니다. 예수님의 세례와 요한의 세례는 다릅니다. 마태복음 3장 11절에 보시면 요한의 세례는 회개케 하기 위하여 보낸 세례지만 요한이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며”라고 했습니다.
성령과 불의 세례는 구원의 세례입니다. 물세례는 회개케 하는 세례에 불과했습니다. 물세례 위에 성령과 불의 세례가 있을 때에 바로 우리의 구원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불세례를 가지고서 구원의 역사를 이루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고 물세례를 가지고서는 이룰 수 없으므로 예수님은 두 번째 다시 세례를 받아야 하였으니 이는 곧 십자가의 세례였던 것입니다.
눅12:49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
예수님이 말씀을 던져서 기사이적을 행하며 죽은 자를 살리고, 앉은뱅이를 일으키는 이러한 기사이적을 행할 때에 불이 붙을 줄 알았는데 예수님의 말씀에 성령의 불은 붙지 않았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마저도 마음에 불이 붙지 않아서 주를 위하여 목숨을 바칠 자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십자가의 세례를 받으신 이후 불같은 성령을 받았던 제자들은 목숨을 걸고 주를 위해서 복음을 전파함으로 예수님은 이 땅 위에 예수님의 불을 붙이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 부활 이후 성령의 역사는 불같은 성령으로 오늘날 천주교와 기독교가 세계상에 우뚝 선 종교가 된 것입니다.
전 세계에 기독교인이 십억, 천주교인이 십억입니다. 약 이십억이나 되는 사람들이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모시고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시에는 불을 붙이러 왔으나 그리스도에 대한 불이 붙지 아니함으로 예수님이 또 다시 두 번째 세례 곧 십자가의 세례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롬6:3~4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예수님의 두 번째 받은 세례는 십자가의 세례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세례를 통해서 이 땅 위에 그리스도의 불을 붙이고 천국의 불이 붙었다는 사실을 깨닫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오늘 여러분에게 말씀 드리고자 하는 것은 세례 요한은 자의로 이 땅에 온 것이 아니라 말라기 선지자의 예언에 의해서 왔다는 것입니다. 말라기 선지자가 어떻게 예언을 했는가 하면 그 예언한 내용을 확인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말4:5~6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그가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비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
하나님이 엘리야를 보내 준다고 하고서 세례 요한이 엘리야의 심령으로 와서 아비의 마음을 자식에게 돌이키게 하고 자녀의 마음을 아비에게 돌이키게 하는 이 말씀은 하나님의 마음을 하나님의 백성에게 돌이키게 하고(눅1:16) 하나님 백성의 마음을 하나님께로 돌이키게 한다는 역사입니다. 이런 역사를 오리라 한 엘리야가 행할 것을 예언해 놓았습니다.
그러면 세례 요한의 출생에 관해서 보시겠습니다.
눅1:15~17 이는 저가 주 앞에 큰 자가 되며 포도주나 소주를 마시지 아니하며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이스라엘 자손을 주 곧 저희 하나님께로 많이 돌아오게 하겠음이니라 저가 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앞서 가서 아비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리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예비하리라
이 말씀은 오리라 한 엘리야가 와서 주를 위하여 세운 많은 백성을 예비함으로 예수의 길을 평탄하게 예비하고 길을 닦아 줄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아주 짝이 맞게 잘 증거가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과연 오리라 한 엘리야가 세례 요한이었는가 하는 것을 확인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마17:10~13 제자들이 묻자와 가로되 그러면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 하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엘리야가 과연 먼저 와서 모든 일을 회복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엘리야가 이미 왔으되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임의로 대우하였도다 인자도 이와 같이 그들에게 고난을 받으리라 하시니 그제야 제자들이 예수의 말씀하신 것이 세례 요한인 줄을 깨달으니라
세례 요한이 엘리야로 왔다는 것을 제자들이 이제 와서 깨닫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예수님의 제자들은 답을 얻었습니다. 서기관들이 말하기를 “오리라 한 엘리야가 누구냐? 너희 선생이 맞느냐?” 이렇게 말하자 “우리 선생님의 말에 오리라 한 엘리야가 세례 요한이라고 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몰려가서 세례 요한을 찾아가 질문을 하게 됩니다.
요1:19~21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요한에게 보내어 네가 누구냐 물을 때에 요한의 증거가 이러하니라 요한이 드러내어 말하고 숨기지 아니하니 드러내어 하는 말이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한대 또 묻되 그러면 무엇 네가 엘리야냐 가로되 나는 아니라 또 묻되 네가 그 선지자냐 대답하되 아니라
만약에 오리라 한 엘리야가 세례 요한이라고 말하였더면 메시아는 자동으로 예수님이 되기 때문에 예수님의 길은 활짝 열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록된 말씀과 같이 예수님이 오리라 한 엘리야가 세례 요한이라고 했는데 세례 요한이 “나는 엘리야가 아니다. 선지자도 아니다.” 라고 말을 함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완전히 이단적이고 거짓말쟁이 되게 하므로 세례 요한은 자기 사명을 포기한 것입니다.
세례 요한의 사명은 예수님의 길을 평탄케 하며 대로의 길을 열기로 작정한 예언이었으나 세례 요한은 기록된 말씀과 같이 나는 오리라 한 엘리야가 아니라 함으로 그 길을 닦기 위해서 왔다는 그 말 자체가 거짓말이 되었고 예수님의 가는 그 길을 따라가지 않고 다른 길을 갔다는 사실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바로 세례 요한은 예수님에 대해서도 도전적인 일을 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습니다.
세례 요한에 관해서 예수님의 그 길을 예비하기보다는 도리어 예수님의 길을 막는 내용에 관하여 성경을 통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마11:1~3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명하시기를 마치시고 이에 저희 여러 동네에서 가르치시며 전도하시려고 거기를 떠나가시니라 요한이 옥에서 그리스도의 하신 일을 듣고 제자들을 보내어 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배신자라도 이런 배신자가 있을 수 없습니다. 세례 요한이 자기 입으로 예수님에 대하여 말하기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로다”라고 말을 했고 또 세례를 받고 예수님이 물 위에서 올라오실 때 성령이 비둘기 같이 강림하는 것을 눈으로 보고 하나님께서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내 기뻐하는 자다.” 하는 음성을 듣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내가 증거 하노라” 이렇게까지 말했던 세례 요한이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이렇게 말한 것은 세례 요한이 예수님에 대한 막말을 한 것이며 예수님에 대한 항의로서 “당신이 진짜요? 가짜요?” 하는 내용입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교인이 저한테 와서 “목사님이 진짜 목사가 맞습니까?”라고 말을 한다면 이렇게 질문하는 성도와 그 목사는 스승과 제자의 길을 포기한 것입니다. 대통령으로부터 명(命)을 받은 장관이 대통령을 만나서 “당신이 대통령이요?” 이렇게 말한다면 이것은 대통령과의 관계가 끝난 것일 뿐만 아니라 장관의 사명을 포기한 것입니다. “오실 그이가 당신입니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려야 합니까?” 이러한 말을 한 세례 요한이 어떻게 예수의 길을 예비하는 자가 되겠습니까.
요3:28 나의 말한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한 것을 증거할 자는 너희니라
세례 요한은 당연히 메시아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요 주의 길을 예비하는 자가 세례 요한 본인이라고 말을 해야 되는데 “나의 말하는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한 것을 증거 할 자는 너희니라” 하고서 자기의 사명을 제자들에게 넘겨 버렸습니다. 이는 요한이 예수님의 길 예비자 됨을 포기한 것입니다.
요3:29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이 충만하였노라
이 말은 세례 요한이 한 말로써 예수님에 대하여 친구라고 자청한 것입니다. 이것은 교만입니다. 친구라는 단어의 뜻은 오랫동안 친하게 지냈다는 뜻인데 이 친구는 어느 정도의 사이가 친구인지를 성경을 통해 보시겠습니다.
요15:15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
세례 요한이 예수님의 친구라면 하나님께 들은 것을 다 알게 해 준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요한을 친구같이 생각하고 하나님께 들은 것을 다 알게 해 주었습니다. 하늘의 뜻과 비밀을 다 알고 세례 요한은 자기가 한 말에 자기가 거짓말을 한 것입니다.
요한은 그리스도에 대하여 “나는 그의 신발 끈을 풀어 주기도 감당 못하는 종 같이 낮은 자다.” 이렇게 말을 해 놓고 또 감히 친구라고 말을 한 것을 볼 때에 그리스도에 대하여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할 자라고 말한 것은(마3:11) 거짓말 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의심하고 불신하는 입장에서 어떻게 감히 예수님을 보고 친구라고 말할 수가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위선자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오실 그이가 당신입니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려야 합니까?” 라고 했을 때에 예수님이 답변하시기를 “내가 오실 그이니라” 이렇게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뭐라고 답변을 하셨는가 하면 “너희들이 눈으로 보는 것을 요한에게 가서 전하라” 이것도 비유로 하신 말씀입니다. “소경이 보고 앉은뱅이가 걸어 다니고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고 귀머거리가 듣고 죽은 자가 살아나고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고 일러주어라” 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요한의 제자들에게 말한 것입니다. 여기에서 소경이 본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면 세례 요한은 영적인 소경이 되어서 예수를 잘 보지 못했습니다. 영맹(靈盲)의 소경이었습니다. 그는 잠시 성령에 감동을 받았을 때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증거를 해 놓고 그 본 것을 확실하게 믿지 않았던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소경이 아니고 영안이 열린 눈으로 예수를 바로 보았다면 “오리라 한 메시아가 당신입니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려야 합니까?” 이런 막말을 감히 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앉은뱅이가 걸으며” 라고 했는데 세례 요한은 영적으로 앉은뱅이라는 것입니다. 앉은뱅이가 아닌 이상 메시아의 대로의 길을 평탄케 하겠다고 나선 자가 예수님의 세례 이후에 단 한 번도 예수님을 만나러 온 사실이 없었으니 세례 요한은 앉은뱅이가 분명한 것입니다. 앉은뱅이가 아니었다면 자칭 길 예비자라고 한 사람이 메시아를 단 한 번도 만나러 오지 않았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는 요한이 앉은뱅이라는 증거입니다. 이는 마치 유명한 정치인이 대통령의 선거에 앞장서겠다고 호언장담하고서 대통령 선거가 끝나기까지 단 한 번도 찾아오지 아니한 것과 마찬가지요 이러한 가증한 자와 같은 자가 세례 요한입니다.
그리고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는다고 알려 주어라” 라고 하였습니다. 문둥병은 무서운 병인데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사람이 마귀의 형상으로 변한 것이 문둥병입니다. 이러한 문둥병자의 형상을 한 사람이 새로운 사람으로 깨끗함을 받았다는 것은 어둠에 속한 자가 빛으로 나온다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문둥병에 걸린 자가 아니면서 어떻게 예수님께 얼굴 한 번 내비치지 않았는지, 예수님이 전한 말씀을 많은 사람이 듣고 예수님을 따르는데 요한은 어찌하여 귀가 먹었는지, 예수님이 무엇을 전하는지를 알지 못해서 네 제자들을 시켜서 예수님께 “오실 그이가 당신입니까 우리가 다른 사람을 기다려야 합니까?” 하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불신한 말을 할 수가 있는지 하는 것입니다.
“죽은 자가 살아나며 심령이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는 것을 알려주어라” 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 본인이 메시아인지 아닌지를 답변해야 하는데 예수님은 세례 요한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말을 돌려서 비유로 하고 싶은 말씀을 다 하신 것입니다.
빗대어서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고 알려주어라 라고 말을 했습니다(마11:2~5). 그리고 세례자 요한에 대하여 심판을 한 것입니다.
마11:6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예수님은 요한의 제자들에게 “나로 인하여 실족지 아니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알려주어라” 라고 한 말은 세례 요한이가 실족했다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이 왜 실족(失足)을 했는가 하는 것입니다. 실족이라는 것은 발을 잘못 디뎌서 한쪽 다리가 교통사고를 당해 잘려 나갔거나 없어졌을 때 실족(失足)했다고 하는데 세례 요한이 실족했기 때문에 예수님께 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네가 나(예수)에게 메시아라고 하며 주의 길을 예비 하겠다고 네 입으로 광야에서 외쳐 놓고 단 한 번도 나(예수)를 찾아오지 않았기 때문에 나로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 라고 세례 요한에게 알려 주어라 한 것입니다. 누가 실족한 자인지 보시겠습니다.
요11:9~10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낮이 열두 시가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 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 고로 실족하느니라
세례 요한은 영적으로 보면 밤길을 다닌 것입니다. 캄캄한 소경의 길을 다닌 것입니다. 낮에 다니는 사람은 빛이 있으므로 실족할 일이 생기지 않지만 밤에 다니는 자는 실족한다고 예수님이 비유로 돌려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는 세례 요한이 빛에 거하지 않고 도적놈이 밤을 기다리고 밤길을 다니는 것과 같이 어두운 생활을 했다는 것입니다.
잠4:10~12 내 아들아 들으라 내 말을 받으라 그리하면 네 생명의 해가 길리라 내가 지혜로운 길로 네게 가르쳤으며 정직한 첩경으로 너를 인도하였은즉 다닐 때에 네 걸음이 곤란하지 아니하겠고 달려갈 때에 실족하지 아니하리라
지혜의 길, 정직한 길, 첩경의 곧은 길을 가는 자는 실족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실족이라는 것은 무슨 뜻인가 하면 예를 들어 누가 큰 사업을 해 준다고 해서 투자를 했는데 사기를 당했다면 사기를 당한 이 사람은 실족 할 수가 있습니다.
또한 집의 재산을 다 팔아서 공부시켜 대학을 보냈는데 법대 다닌다고 하고서 나중에 알고 나서 보니 여자와 연애하고 돌아다니느라 학교도 나가지 않고, 공부도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부모는 아들이 법대 다닌다고 동네방네 자랑하고 땅도 팔고, 집도 팔아 아들에게 다 주었는데 알고 보니 타락한 아들이 재산만 날려 버린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러한 경우 부모님의 마음이 아들에 대하여 실족하지 아니하겠습니까?
그러나 성경은 지혜의 길, 정직한 길, 첩경의 길을 가는 자는 실족하지 아니하리라고 한 줄 믿습니다. 세례 요한에게 예수님이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한 자가 복이 있다” 고 말씀하신 것은 요한이 지혜의 길, 정직한 길, 첩경의 길을 가지 않았다는 뜻이며 타락한 아들과 같이 예수님에 대하여 요한이 실족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11:7 저희가 떠나매 예수께서 무리에게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요한의 제자들이 가고 난 뒤에 예수님이 제자들을 보고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라고 했습니다. 광야에는 세례 요한이 외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세례 요한의 말을 들으려고 광야에 나갔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느냐고 제자들을 책망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때는 예수님의 제자로서 “아멘” 하고 광야에 가서 세례 요한의 말을 들을 때는 또 “아멘”을 하며 두 주인을 섬기는 제자들에 대하여 예수님이 화가 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길을 예비한다고 믿었던 세례 요한의 모습에 예수님의 마음이 어떠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도와줘야 하는 사명을 갖고 왔지만 너무나 위대하고 좋은 집안에서 나온 아비야 반열의 제사장의 아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런 그가 외침으로 온 유대와 예루살렘의 수많은 사람들이 파도같이 몰려오는 가운데서 세례자 요한은 스스로 예수의 제자 되었음을 선포하고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을 증거 해 주어야 되는데 예수님에게 도리어 “오실 그이가 당신입니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려야 합니까?”라고 제자들을 보내어 문의하였으니 이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져야 하는 일이 생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가장 신실하게 믿었던 또한 성경적으로 예언된 사명자로 나왔던 그가 예수님을 모르고 예수님을 배신했을 때에 예수님의 그 마음이 얼마나 아팠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라고 책망을 하였습니다. 갈대는 바람이 조금만 불어도 흔들흔들 합니다. 신앙의 뿌리가 튼튼한 사람은 튼튼한 나무와 같이 바람이 아무리 불어도 나무기둥이 흔들리지 않는데 신앙이 약하고 믿음이 없는 사람은 조금만 어려움이 와도 흔들리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에 대하여 불신한 말을 듣고 제자들의 신앙이 흔들렸기 때문에 “너희가 흔들리는 갈대냐”라고 책망을 한 것입니다.
마11:8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부드러운 옷을 입은 자들은 왕궁에 있느니라
세례 요한이 부드러운 약대 털옷을 입었는데 그 부드러운 옷을 보기 위해 광야에 나갔다고 책망하시고 세례 요한보다 부드러운 옷을 입은 사람은 왕궁에 있다고 제자들을 비꼬아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세례 요한에 대한 화가 제자들에게로 미친 것입니다.
마11:9~10 그러면 너희가 어찌하여 나갔더냐 선지자를 보려더냐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도 나은 자니라 기록된 바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저가 네 길을 네 앞에 예비하리라 하신 것이 이 사람에 대한 말씀이니라
예수님의 길을 예비할 자가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아니면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라고 요한이 제자들을 보내어 예수님께 문의하였을 때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요한에 대하여 기록된바(말3:1)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저가 네 길을 네 앞에 예비하리라 하신 것이 이 사람(세례 요한)에게 대한 말씀이라고 강조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세례 요한에 대하여 포기하고 저주 같은 심판을 한 것입니다.
마11:11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
이에 예수님은 세례 요한에 대하여 천국에서 제일 작은 자도 세례 요한보다 크다고 했기 때문에 이는 세례 요한이 천국에 결단코 갈 수 없다는 것으로 우회적 저주를 한 것입니다.
마11:12~14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모든 선지자와 및 율법의 예언한 것이 요한까지니 만일 너희가 즐겨 받을찐대 오리라 한 엘리야가 곧 이 사람이니라
그러나 오리라 한 엘리야가 세례 요한인 줄 믿습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입에서 나간 말씀은 헛되이 하나님께 돌아가지 않고 틀림없이 이루어진다고 하였는데 왜 요한이 영적인 엘리야로서 사명이 이루어지지 않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이 실족하고 주의 길을 왜 의심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리라 한 엘리야는 성경에 어떻게 예언이 되어 있는지 보시겠습니다.
말4:5~6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그가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비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
눅1:15~17 이는 저가 주 앞에 큰 자가 되며 포도주나 소주를 마시지 아니하며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이스라엘 자손을 주 곧 저희 하나님께로 많이 돌아오게 하겠음이니라 저가 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앞서 가서 아비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리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예비하리라
이 말을 한 것은 기록된 말씀과 같이 바로 세례 요한이 태어났을 때에 천사가 요한에 대해서 엘리야의 심령을 가지고 와서 아비의 마음을 자식에게 돌이키고 자식의 마음을 아비에게 돌이키게 하리라고 할 자가 바로 요한이라고 지적해서 말을 한 것입니다.
이 역사는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라고 했으므로 예수님의 시대는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의 일이 일어날 때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크고 두려운 날은 아직 남아 있습니다. 크고 두려운 날이 아직 남아 있다는 증거를 보시겠습니다.
욜2:31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같이 변하려니와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같이 변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하면 진리의 태양이 되신 하나님, 궁창의 증인이 된 달과 같은 예수님이 구원의 빛을 발하지 않고 구름에 가리워 빛을 비추지 아니한 때를 말합니다.
욜2:32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이는 나 여호와의 말대로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서 피할 자가 있을 것임이요 남은 자 중에 나 여호와의 부름을 받을 자가 있을 것임이니라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선지 엘리야를 보낼 그 때에 해가 빛을 잃게 된다고 했습니다. 시편 84장 11절에 보시면 하나님은 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빛, 진리의 빛을 잃는다는 것입니다. 해가 빛을 잃고 어두워지는 역사는 바로 그리스도 이후 계시록의 예언이 이루어지는 심판 때에 여섯째 인을 뗄 때에 일어나는 심판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재림에 앞서 엘리야가 다시 오게 될 것을 예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계6:12~16 내가 보니 여섯째 인을 떼실 때에 큰 지진이 나며 해가 총담같이 검어지고 온 달이 피같이 되며 하늘의 별들이 무화과나무가 대풍에 흔들려 선과실이 떨어지는 것같이 땅에 떨어지며 하늘은 종이 축이 말리는 것같이 떠나가고 각 산과 섬이 제 자리에서 옮기우매 땅의 임금들과 왕족들과 장군들과 부자들과 강한 자들과 각 종과 자주자가 굴과 산 바위 틈에 숨어 산과 바위에게 이르되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낯에서와 어린 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우라
계시록에 예언된 심판이 이루어지는 어린양 예수의 진노의 때에 해가 빛을 잃고 달이 핏빛같이 된다고 하였습니다. 바로 여섯째 인의 심판 때가 크고 두려운 날의 심판 날입니다. 그날이 오기 전에 선지 엘리야를 보낸다고 했으니 제2의 영적인 엘리야, 세례 요한 같은 자가 크고 두려운 날, 여섯째 인의 심판이 이루어지기 전에 다시 올 것을 예언한 것입니다.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엘리야 같은 선지자가 와서 대로의 길을(사40:3~5, 사35:8~10) 예비할 그 때에 그 선지자가 오게 되면 우리는 그의 말씀에 준행함으로 주의 길을 예비하는데 앞장 서는 존귀한 자들로 축복되시기를 예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