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수건을 벗어라!

본문말씀 : 고린도후서 3장 13~18절

우리는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들로 장차 없어질 것의 결국을 주목치 못하게 하려고 수건을 그 얼굴에 쓴 것같이 아니하노라 그러나 저희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라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오히려 벗어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 오늘까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이 오히려 그 마음을 덮었도다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어지리라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성경은 마태복음 13장 34절에 있는 말씀과 같이 비유가 아니면 아무 것도 말씀하지 아니하셨다고 할 정도로 비유로 기록되어 있는 말씀입니다.

마13:11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 되었나니

천국이 허락되지 아니한 자들이 알아듣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비유로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사십일 동안 밤낮 주야로 기도하고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하나님이 쓰신 십계의 두 돌판을 손에 들고 내려올 때에 얼굴에 찬란한 광채가 났습니다(출34:29). 그 때 광채가 나서 아론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감히 모세의 얼굴을 쳐다보지 못했습니다(출34:30). 모세의 얼굴에서 찬란한 빛의 광채가 남으로 쳐다보지 못하여 할 수 없이 수건으로 얼굴을 가리웠던 것입니다.

출34:35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의 얼굴의 광채를 보는 고로 모세가 여호와께 말씀하러 들어가기까지 다시 수건으로 자기 얼굴을 가리웠더라

그 찬란한 옷, 태양같이 빛나는 아주 밝은 빛의 얼굴, 그 빛이 바로 생명의 빛입니다. 그 생명의 빛을 바라보고 그 빛을 받아야 비로소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축복을 받을 수 있는데 그 빛을 보지 못한 것은 하나님(요일1:5)을 보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이 섬기지 말라고 한 우상을 섬겼고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춤을 추고 있었을 때였습니다. 십계명 곧 언약의 두 돌판을 받아 가지고 오기 이전에 모세가 하나님께로부터 십계명의 명을 받아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십계명의 언약을 지키겠느냐고 물어 보라고 했습니다. “너희 백성들이 십계명의 율법을 지키겠느냐, 지키지 못하겠느냐”하고 문의하였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말하기를 “저희들이 그 법을 지키겠습니다” 하였으나 지키지 않았습니다.

모세를 하나님께서 다시 불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킨다고 하였으나 지키지 않으니 이제는 문서화해야 되겠다” 하고서 양피에 십계명을 적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지키라고 보냈는데 또 지키지 않았습니다. “이번에는 법을 변경할 수 없도록 돌 판에 새겨야 되겠다.” 양피에 새긴 것은 물로 닦으면 지워지니까 지울 수가 있기 때문에 돌 판에 파서 새겨야 되겠다, 하고서 모세가 산에서 양손의 두 돌 판에 십계명을 새겨 가지고 내려올 때에 하나님의 법을 가졌으므로 모세의 얼굴 꺼풀에 찬란한 빛이 났습니다.

하나님의 참사람, 율법을 범하지 아니한 죄 없는 사람은 모세의 찬란한 얼굴을 쳐다볼 수 있었지만 백성들이 얼굴을 쳐다볼 수 없었던 것은 아론으로부터 시작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가 없는 사십일 동안에 금목걸이, 금반지를 전부 가져오라고 하여 그것을 가지고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이것이 우리의 신이다”라고 하면서 춤을 추고 있었던 것입니다. 십계명 돌판의 제일 첫 번째가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고 한 법이었는데 우상을 만들어 놓고 춤을 추고 있었으니 무슨 양심으로 모세의 얼굴을 쳐다볼 수 있었겠냐는 것입니다. 모세의 얼굴을 쳐다보지 못한 것은 그들의 마음이 이미 범죄한 백성이요 캄캄한 어둠의 아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어둠에 있는 사람은 빛을 바라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지하실의 어두운 곳에서 일하다가 여름에 쨍쨍 빛나는 바깥에 나오면 눈을 못 뜹니다. 이와 같이 어둠의 생활에 있던 사람들이 찬란하게 빛나는 모세의 얼굴에 광채 나는 빛을 쳐다 볼 수가 없었습니다. 율법시대에는 율법을 지켜야 구원을 받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되는 것인데 율법을 지키지 아니함으로 감히 하나님의 법을 가지고 내려온 모세의 얼굴을 쳐다볼 수가 없었습니다.

본문 말씀에 기록된 것을 보시면 “우리는 모세의 광채 난 얼굴을 주목하지 못한 것과 같지 아니 하도다” 하는 것은 “우리는 빛의 아들이요 하나님의 법을 범한 죄인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모세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를 쳐다보지 못한 즉 율법을 범한 이스라엘 백성과 같은 사람이 아니다”라고 한 것입니다. 이와 같은 축복이 있기를 원합니다. 그러므로 율법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이 지켜야 할 법입니다.

고후3:13~14 우리는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들로 장차 없어질 것의 결국을 주목치 못하게 하려고 수건을 그 얼굴에 쓴 것같이 아니하노라 그러나 저희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라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오히려 벗어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

기록된 말씀과 같이 오늘날 구약을 읽을 때에 이 시간까지도 율법의 수건이 벗어지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만이 수건(율법)이 없어질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이 수건은 율법을 말한 것이요 실상의 수건을 말한 것이 아닌 줄 믿습니다.

고후 3:14 그러나 저희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라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오히려 벗어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

마음이 완악하여 오늘날까지 수건(율법)이 벗어지지 않고 있다는 것은 수건의 율법이 사람의 마음을 덮었다는 것입니다. 수건은 율법을 말합니다. 율법을 어긴 자들은 율법아래 있는 자들로서 십계명의 율법이 수건이 되어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을 덮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율법의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고 하였으므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심으로써 십계명 율법의 수건이 예수로 말미암아 벗어질 줄 믿습니다.

오늘날 이 시대부터 모세 때까지 따지면 약 사천 년 전부터 오늘 이 시간까지 모세의 율법에 매여 율법의 종이 되고, 율법에 꽁꽁 묶여서 율법의 수건이 벗어지지 않고 있는 것이 오늘날 현실입니다. 이는 예수님의 십자가로 죄가 되는 율법의 시대를 끝냈기 때문입니다(엡2:15~16, 롬10:4). 그런데 천주교와 안식교에서는 이천년 전에 예수 십자가로 폐지시킨 율법을 지키기 위하여 지금도 예배 볼 때에 머리에 수건을 쓰고 있습니다. 수건은 율법을 상징하기 때문에 머리에 수건을 쓰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께로 돌아가면 예수 안에 있는 자들은 정죄함이 없기 때문에 율법이 존재할 수가 없으므로 율법이 벗어진 것이요, 수건이 벗어진 것이라고 말씀하였습니다.

고후3:15~17 오늘까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이 오히려 그 마음을 덮었도다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어지리라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

율법은 자유를 견제합니다. 죄인은 자유함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경찰관이 찾는 죄인은 이 지구상에 어느 곳에도 편한 장소가 없습니다. 율법이 죄를 정하기 때문에(롬5:13) 율법에서 벗어나고 율법에서 해방받은 자들은 죄에서 해방받고 율법에서 벗어난 자들로서 자유함이 있는 것입니다.

고후3:18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수건을 쓰고 거울을 보면 얼굴이 보이지 않는 것은 당연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율법의 수건을 쓰고 자기 자신을 보면 자기 자신이 보이지 않는 것이고 주님도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머리의 수건을 벗고 거울을 보면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보는 것과 같이 자기의 얼굴이 예수와 같은 얼굴로 점차 변하는 것을 볼 수 있게 될 줄 믿습니다(고전13:12).

이것은 놀라운 새 생명의 말씀입니다. 주의 영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의 얼굴, 주님의 얼굴로 변화 받게 될 줄 믿습니다. 이것은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빌3:21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

예수님의 몸은 어떠한 몸이었는가.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은 제자들이 두려워서 방문을 닫아 놓고 있는 가운데 주님께서 나타나셔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평안할지어다”하고 나타났습니다. 이 세상에서 방문 닫아 놓은 가운데 들어올 사람이 누가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시공간을 초월한 분이셨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분은 또 방문을 닫아 놨어도, 만리장성과 같이 두꺼운 벽이 있어도 그 벽을 뚫고 평길을 걸어 다니시는 것과 같이 성벽을 걸어서 나가시는 분입니다. 그런 주님의 모습으로 수건을 벗은 자들이 예수님의 얼굴로 화하여 변하여진다는 말씀입니다(요일3:2).

이 말씀을 통해서 수건을 벗은 자, 율법을 벗은 자 되어서(롬7:6) 우리 주님을 만날 때에 주님의 형상으로 변화하는 귀한 자들로 축복되시기를 원합니다.

변화산상에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 옷이 빛과 같이 희어지고 얼굴에 광채가 났습니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면 산 자의 얼굴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체의 얼굴을 경험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같이 빛나고 광채 나는 영광스런 얼굴의 몸을 가진 사람이 되었을 때 영생을 하는 것이지 죽을 수밖에 없고 썩을 수밖에 없는 죄인 된 육체의 몸으로는 영생을 할 수 없습니다(고전15:42~43).

예를 들어 교통사고가 나면 창자가 터져서 죽고 머리가 깨져서 죽을 사람들이 어떻게 영생을 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총 맞으면 죽고 칼 맞으면 죽는 것이 사람인데 방문 닫아 놓은 가운데 나타나신 주님은, 신령한 몸으로 부활하신(고전15:42~44) 영으로 계신 주님이었고 영이면서도 육체를 가졌던 주님이었습니다.

떡도 잡수시고 생선 구운 것도 잡수신(눅24:42~44, 행10:41) 부활하신 예수님은 우리의 죽을 수밖에 없는 낮은 몸을 예수의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여 주실 것을 약속하여 주셨습니다(빌3:21). 변화체의 변법으로 영생의 몸을 제자들에게 보여주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신 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계신 장소 바로 성경에서 말하기를 성소라고 일컫게 됩니다(시68:35). 앞으로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는 말은 성소에 들어간다는 말과 아주 동일 합니다. 그래서 성소에 들어간다는 말씀의 내용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히9:8 성령이 이로써 보이신 것은 첫 장막이 서 있을 동안에 성소에 들어가는 길이 아직 나타나지 아니한 것이라

첫 장막이 서 있을 동안에는 성소에 들어가는 길이 나타나지 않았다는 말은 첫 장막이 없어져야 성소에 들어가는 길이 나타난다는 말씀입니다. 이 성소는 세상에 속한 성소가 있고 하늘에 속한 성소가 있습니다.

그러면 세상에 속한 성소는 어떠한 곳이었는가 보시겠습니다.

히9:1~2 첫 언약에도 섬기는 예법과 세상에 속한 성소가 있더라 예비한 첫 장막이 있고 그 안에 등대와 상과 진설병이 있으니 이는 성소라 일컫고

기록된 말씀은 세상에 속한 성소입니다. 이 성소를 만들 때에 천막으로 울타리를 쳐 놓고 그곳에서 하나님 앞에 제사 드리는 거룩한 장소를 성소라고 했습니다.

사람이 작은 죄를 지으면 비둘기 잡고, 큰 죄를 지으면 양 잡고, 아주 큰 죄를 지으면 송아지를 잡아서 제사를 드리는 그런 장소가 성소이고 그 제사를 드리는 제사장이 있었으며 또 둘째 휘장 뒤에는 지성소라는 것이 있습니다.

히9:3~4 또 둘째 휘장 뒤에 있는 장막을 지성소라 일컫나니 금향로와 사면을 금으로 싼 언약궤가 있고 그 안에 만나를 담은 금항아리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와 언약의 비석들이 있고

언약의 비석들은 바로 십계명의 두 돌 판을 가리켜서 언약의 비석들이라고 합니다.

히9:5~9 그 위에 속죄소를 덮는 영광의 그룹들이 있으니 이것들에 관하여는 이제 낱낱이 말할 수 없노라 이 모든 것을 이같이 예비하였으니 제사장들이 항상 첫 장막에 들어가 섬기는 예를 행하고 오직 둘째 장막은 대제사장이 홀로 일 년 일 차씩 들어가되 피 없이는 아니하나니 이 피는 자기와 백성의 허물을 위하여 드리는 것이라 성령이 이로써 보이신 것은 첫 장막이 서 있을 동안에 성소에 들어가는 길이 아직 나타나지 아니한 것이라 이 장막은 현재까지의 비유니 이에 의지하여 드리는 예물과 제사가 섬기는 자로 그 양심상으로 온전케 할 수 없나니

이 장막은 현재까지의 비유라고 말한 것은 그것이 비유로 기록되어 있는 것과 같이 현재는 과거의 것을 비유하여 미래의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짐승을 잡아서 피를 드리는 제사를 드려봐야 하나님 앞에 온전하게 할 수 없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두 번째 휘장은 무엇인가 하면 거기에는 금으로 싼 언약궤가 있고 또 금 항아리가 있었습니다. 금 항아리에는 무엇이 있었는가 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갈 때에 하늘에서 만나가 내렸는데 그 만나는 마치 깟씨 같고 과자 같이 달고 고소하다고 했습니다(출16:31, 민11:7).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십년 동안 그 만나를 먹었는데 어떤 사람은 욕심이 많아서 내일 아침에 시장하면 먹으려고 두었더니 전부 다 썩어서 벌레가 바글바글 거렸습니다. 그러나 금 항아리에 담아 놓은 만나는 사십년이 지나도 썩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만나는 무엇을 말하는가 하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살과 피를 주신 것을 떡이라고 말했고 예수님 자신을 하늘에서 내려온 산 떡이라고 하였습니다(요6:51). 또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먹은 만나를 떡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광야에서는 하늘에서 내려준 만나를 먹어도 죽었는데 먹고도 죽지 아니하는 만나의 떡이 있다고 했습니다.

요6:49~51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이는 하늘로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 하시니라

이 떡은 바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의 떡입니다. 이 말씀의 떡도 많은 사람이 먹고 다 죽었습니다. 예수님 말씀을 듣고 영생한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구약시대와 같이 하룻밤 지나므로 다 썩은 것과 같이 말씀이 다 썩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듣고 하룻밤 자고 나면 언제 무슨 설교를 했는지 모르고 그 들었던 말씀이 다 썩어서 없어지는 그런 신앙생활을 하는 곳이 오늘날 기독교인들의 신앙이었는데 금 항아리에 담아 놓은 만나는 사십년이 넘도록 썩지 않아서 가나안 땅에 가서 기념으로 광야에서 내린 그 만나를 보여 주었습니다. 이와 같이 먹고 썩지 않은 만나, 그 만나가 바로 금 항아리에 들어 있는 떡의 말씀입니다.

계2:17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 돌을 줄 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 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

기록된 말씀과 같이 말세에는 감추었던 만나를 먹어야 합니다. 만나의 떡, 그 떡의 말씀이 오늘 증거 되는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영생의 떡입니다. 하나님이 항아리를 만들 때에 진흙으로 만드셨고 하나님은 토기장이요, 우리는 항아리라고 말씀을 했습니다(사64:8).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 땅 위에 있는 많은 사람들을 그릇으로 만들 때에(롬9:24) 금그릇도 만들고 은그릇도 만들고 토기그릇이 되는 사람들을 만드셨는데(딤후2:20~21) 마지막 때에는 하나님께서 금 항아리 그릇을 만들고 금 항아리 그릇에 있는 말씀은 한 번 들으면 쉽게 잃어버리지 않는데 그것은 금 항아리에 담겨 있는 말씀은 썩지 않는 말씀의 그릇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종말의 사명자들을 금그릇으로 더 큰 사명자는 금 항아리로 비유하였습니다.

사64:8 그러나 여호와여 주는 우리 아버지시니이다 우리는 진흙이요 주는 토기장이시니 우리는 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이라

이왕 항아리의 사명을 하려면 금 항아리의 사명을 하는 것이 좋습니다. 말씀이 떠나가지도 아니하고 아무리 말씀을 증거해도 영원토록 생수와 같이 샘솟는 말씀이 나오는 우물 같은 입이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해서 둘째 휘장에는 금 항아리와 하늘의 언약궤가 있었다고 말씀했습니다.

이 땅에 있었던 세상의 성소가 있고 하늘의 성소가 있는데 오늘 여러분에게 증거 하고자 하는 것은 세상의 성소를 말하는 것이 아니요 하늘의 성소를 말씀함입니다.

겔47:12 강 좌우 가에는 각종 먹을 실과나무가 자라서 그 잎이 시들지 아니하며 실과가 끊치지 아니하고 달마다 새 실과를 맺으리니 그 물이 성소로 말미암아 나옴이라 그 실과는 먹을 만하고 그 잎사귀는 약 재료가 되리라

이 나무가 바로 생명나무입니다.

계22:1~2 또 저가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서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실과를 맺히되 달마다 그 실과를 맺히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더라

생명나무 잎사귀가 세상의 만국을 다시 살린다는 것입니다. 에스겔 47장 12절 말씀은 생명나무 잎사귀가 약재료가 된다고 했습니다. 강가에 생명나무가 있고 생명수가 흐르는 그 생명수는 어디에서부터 흐르는가 보면 예수님의 보좌로부터 나오는 생명수입니다. 어린양의 보좌로부터 나오는 생명수를 마시고 또 생명나무 실과를 따 먹으면 창세기 3장 22절에 영생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생명나무가 있는 곳은 그 물이 성소로부터 나온다고 했습니다. 말씀을 깨우쳐야 합니다. ‘2+2=4’이것은 아는 것이고, 어째서‘2+2=4’가 되느냐 하는 그 이유를 아는 사람은 그 뒤에는 가르쳐 주지 않아도 어떠한 수(數)도 계산할 수 있는 자가 되는데 이와같은 것이 깨달음입니다. 그러므로 ‘4+4’가 무엇인지 물어보면 가르쳐 주지 않아서 모른다는 사람은 깨닫지 못한 사람이고 ‘4+4=8’이라고 대답하는 사람은 깨우침을 받은 자입니다. 깨우침을 받으면 스스로 계산합니다. 스스로 정결케 할 수 있는(단12:10) 깨우침을 받은 귀한 자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이와 같이 제가 말씀을 증거할 때에 첫 장막이 서 있을 동안에는 히브리서 9장 8절에 성소에 들어가는 길이 아직 나타나지 아니했다고 했습니다. 이는 곧 성소에 계신 하나님 나라에 들어 갈 수가 없다는 뜻입니다. 첫 장막은 곧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를 지었을 때에 제사 드리기 위해서 천막을 쳤는데 이 첫 장막은 앞으로 있을 것의 그림자라고 했습니다(히10:1). 이 첫 장막은 현재까지의 비유라고 하였습니다(히9:9).

첫 장막은 세상에 있었던 비유로 된 땅에 있는 장막이고 둘째 장막을 지성소라 일컫는다고 했습니다. 땅의 장막은 실상으로 천막으로 쳐 놓고 그 안에는 십계명의 율법이 있으며 또 금항아리도 있는 천막을 쳐 놓은 그런 성소였지만, 하늘의 성소는 생명나무가 있고 어린양의 보좌로부터 나오는 생명수가 있는 영생의 말씀이 있는 곳이 진짜 하늘의 장막이요 하늘의 성소인 줄 믿습니다.

여러분들은 땅의 성소가 아니라 하늘의 성소에 들어가야 합니다. 이것이 이루어지려면 첫 장막 성소(율법이 있는 곳)에 머물러 있지 말아야 합니다.

겔47:12 강 좌우 가에는 각종 먹을 실과나무가 자라서 그 잎이 시들지 아니하며 실과가 끊치지 아니하고 달마다 새 실과를 맺으리니 그 물이 성소로 말미암아 나옴이라 그 실과는 먹을 만하고 그 잎사귀는 약 재료가 되리라

하나님의 성소는 생명수가 보좌로부터 나오는 곳을 성소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성소 곧 하나님이 계신 거룩한 곳에 들어갈 때에 결국(시작과 끝)을 깨달았나이다 하는 것입니다(시73:17).

성소 곧 하나님의 보좌로부터 생수가 솟아나는 그 곳이(겔47:12, 계22:1) 영생하는 나라입니다. 생명나무 실과를 따 먹으면 영생한다고 하였으므로(창3:22) 생명나무가 있는 곳이 지상 낙원인 것입니다(계22:19).

계2:7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하리라

그 생명나무 실과가 있는 것은 물이 성소로부터 나옴이라고 했으므로(겔47:12) 성소(계22:1, 보좌)에 들어갈 때에, 영생의 낙원에 들어갈 때에 그때 가서 많은 사람이 결국을 곧 하나님의 시작과 끝의 비밀을 깨달았나이다 라고 한다고 했습니다(시73:17).

생명나무가 있는 거룩한 곳에 들어가는 것이 성경의 최고의 축복입니다. 성소에 들어갈 때에 처음에는 보좌로부터 물이 졸졸졸 흘러 내려서 그 물이 큰 시내가 되어 시냇물이 하나님의 성소를 둘러 있다고 하였는데(시46:4) 그것이 무엇이 되는가 하면 하나님이 심판 하실 때에 바로 피난처가 됩니다. 다시 설명을 드리자면 마지막 때에 진리의 말씀 생명수가 흐르는 곳 그 성소는 하나님이 계신 거룩한 성전입니다(시11:4).

다시 말씀드리면 금항아리의 말씀이 나오는 곳, 그 곳이 성소에서부터 흐르는 생명강입니다. 거기가 바로 성소의 피난처라는 것입니다.

시46:4~7 한 시내가 있어 나뉘어 흘러 하나님의 성 곧 지극히 높으신 자의 장막의 성소를 기쁘게 하도다 하나님이 그 성중에 거하시매 성이 요동치 아니할 것이라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시리로다 이방이 훤화하며 왕국이 동하였더니 저가 소리를 발하시매 땅이 녹았도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니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셀라)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인 줄 믿습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자면 성소가 있는 거룩한 성 안이 바로 피난처입니다. 땅의 성소는 아무데나 천막만 쳐 놓으면 성소가 되지만 하늘의 성소는 생명강이 둘러있고 그 성 중에 하나님이 계시니 그 성소가 바로 피난처라고 한 줄 믿습니다.

히브리서 9장 8절에 첫 장막이 서 있을 동안에는(율법이 있는 곳에는) 성소로 가는 길이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다고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이 있는 오늘날 교회는 첫 장막이 있는 곳이므로(히9:1~6) 성소의 길이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므로 성소의 생명수가 없는 것입니다.

만나가 왜 썩었는가 하면 생명이 살아 있는 사람은 한 말씀 들으면 “야! 이것이 생명의 말씀이구나, 어디 가서 내가 이런 말씀을 듣겠나” 이런 마음이 가슴에 틀어박혀 있으면 그 말씀이 떠나지 않고 계속 머물러 있습니다. 그 머물러 있는 사람은 성소의 문이 열려서 보좌의 생명수를 먹은 자로서 말씀이 썩지 않고 살아 있는 것이지만 한 말씀 듣고 금방 잊어버리는 사람은 먹을 때는 좋아서 “아멘” 하였지만 성소의 물을 먹지 못한 자로서 광야에서 받은 하늘 만나를 먹지 못하고 보관한 자들이므로 듣고 받은바 말씀이 하룻밤 지나서 다 썩어버린 자들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 성소에 나아가는 길이 이미 열린 자들로서 영생의 양식이 되기를 원합니다. 과거의 여러분들은 땅의 성소에서 예배를 드린 자였으나 이 말씀을 듣고 깨달아서 기쁨이 오는 여러분들은 썩지 아니할 영생의 양식을 먹은 하나님의 백성인 줄 믿습니다.

영생의 양식은 예수님이 십자가상에서 피를 흘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성소에 들어갈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은 것입니다. 구약시대에는 성소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때 짐승을 잡아 사람의 죄를 없이 해 주었는데 하물며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상에서 피를 흘렸으니, 짐승을 잡는 것과 어찌 비교가 되겠으며 또한 거룩한 하나님의 아들의 피가 어찌 우리 양심을 깨끗하게 해 주지 않겠느냐! 라는 말씀입니다.

히9:12~14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로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케 하여 거룩케 하거든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

우리가 예수의 피를 통해서 우리의 죄가 구속함을 받았으니 여러분들은 성소에 들어갈 힘을 받은 자 되기를 원합니다.

히9:12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히10:19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아이들은 둘이 싸우다가 힘이 모자라서 얻어맞고 있다가 자기 형이 오면 그때부터 힘이 나서 담력을 얻는 것입니다. 소 싸움할 때도 주인이 너무 급해서 화장실에 가 버리면 그 소가 이기는 것 같았지만 집니다. 주인이 옆에서 힘을 주면 주인이 없는 소보다도 주인이 있는 소가 이깁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담력을 주었습니다. 무슨 담력을 주었는가 하면 예수님이 성소에 들어갔으니까 우리는 예수의 피를 받은 자로서 예수를 믿는 자에게는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주신 줄 믿습니다.

그런데 성소에 못 들어갈 자들이 있습니다. 이는 첫 장막의 신앙(율법)에 매여 있는 자들의 신앙입니다.

히9:8 성령이 이로써 보이신 것은 첫 장막이 서 있을 동안에 성소에 들어가는 길이 아직 나타나지 아니한 것이라

첫 장막 안에는 십계명의 율법이 있었습니다. 첫 장막이 서 있을 동안에 성소에 들어가는 길이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는 말은 첫 장막 십계명의 법이 서 있을 동안에는 성소에 들어가는 길이 나타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아래 있는 교회들은 첫 장막이 서 있는 교회들입니다. 왜 첫 장막이 서 있는 교회인가 하면 그들은 율법의 신앙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율법을 지켜서 의롭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했는가 하면 율법을 지켜서 의롭게 될 자가 없다고 했습니다(갈2:16).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을 지킴으로서 의롭게 된다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다고 하였습니다(갈2:21).

갈5:4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

기록된 말씀과 같이 율법을 지켜서 의롭게 되겠다고 하는 자들은 이미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자들은 율법이 천막이 되어서 율법에 속한 첫 장막이 둘둘 싸고 있는 세상에 속한 장막입니다. 오늘날 목사님들이 입고 있는 옷이 율법시대에 제사장들이 입고 있던 옷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바리새인들의 제사장들이 입고 있는 옷입니다. 그 옷이 예수를 죽인 율법사들의 옷이 맞는지 안 맞는지 보려면 성지순례에 가서 예루살렘에 가보면 즉시 알 수 있습니다. 성지순례에 가보면 유대인들이 입고 있는 제사장의 옷이 오늘날 목사님들이 입고 있는 그런 옷입니다. 그것이 바로 아직까지 유대인들의 율법 수건을 벗지 않은 증거입니다. 율법의 천막 안에 갇혀 있는 자들인 것입니다.

로마서 7장 6절 말씀과 같이 얽매인 율법(수건)의 신앙에서 벗어나야 성소에 가는 길이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에 성소의 휘장이 찢어졌습니다. 이 말이 무슨 뜻인가 하면 율법의 휘장으로 오늘날 기독교인들의 마음을 덮었는데 성소의 휘장이 찢어졌다는 것은 성소의 천막을 예수의 십자가로 율법의 천막을 다 찢어 없애 버렸다는 뜻입니다.

휘장을 찢어 없애므로 첫 장막이 다 무너진 줄 믿습니다. 첫 장막의 천막이 무너졌으므로 첫 장막에 있는 율법의 언약궤도 무너진 것입니다. 땅의 장막이 무너져야 둘째 장막인 하나님의 성소 곧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오는 것입니다(고후5:1).

히9:8 성령이 이로써 보이신 것은 첫 장막이 서 있을 동안에 성소에 들어가는 길이 아직 나타나지 아니한 것이라

예수님이 첫 장막을 십자가로 찢어버리니까, 첫 장막의 신앙인들에게는 울타리가 없어져 버린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지셔서 첫 장막이 찢어짐으로 말미암아 성소에 나아가는 길이 열렸는데 계속 열려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심판이 시작되기 전 둘째 장막 성소에 나아가는 길은 없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천년 전에 첫 장막을 찢어 버려서 생명나무가 있는 거룩한 성소에 들어가는 길을 열어놓았는데 이 땅에는 아직까지도 율법의 휘장을 찢지 못한 신앙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성소에 들어가는 영생의 길, 생명나무의 길이 열리지 않았습니다.

계22:1~2 또 저가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서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실과를 맺히되 달마다 그 실과를 맺히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더라

아직 신앙이 첫 장막에 머물러 있기 때문에 오늘날 기성 교인들에게는 성소에 가는 길이 열리지 않았습니다. 이 모든 것이 율법의 휘장 안에 가려져서 생명나무의 길이 막혀 버렸습니다.

교회에 나가면 죽어서 천당 가는 것만 알지 생명나무에 나아가서 생명나무 실과를 따 먹고 영생한다는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휘장이 가려져서 영안이 열리지 못하고 성경에 눈이 가려져서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휘장이 찢어져 세상에 속한 성소가 우리에게는 율법의 수건과 함께 없어짐으로써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축복의 길이 열려지게 된 줄 믿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축복입니다. 오늘 말씀을 잘 듣고 깨우침을 받으면 여러분들은 율법에서 벗어나 성소에 들어가는 축복을 받게 될 줄 믿습니다. 그래서 예수 안에서 수건이 벗어지리라 한 그 수건이 무엇인가 하면 여러분의 천국 길을 덮고 있는 율법의 천막입니다. 율법의 수건을 덮어쓰고 있기 때문에 눈이 가려져서 율법의 첫 장막 안에 갇혀 있는 것입니다. 율법의 수건을 덮어 쓰고 있기 때문에 성소에 나아가는 길이 열리지 않았습니다.

첫 장막 안에 있을 때는 여자를 보고 마음에 음욕을 품은 자는 간음 하였느니라, 간음한 자는 살인 하였느니라,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살인자니라 하는 이런 법을 누가 지킬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형제도 미워할 때도 있고 예쁜 여자를 보면 마음이 통하여 한 번 쳐다볼 수도 있는 것인데 세상에 어떤 사람이 이러한 마음의 율법까지 지킬 수가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들이 율법의 줄에 꽁꽁 묶여 있는 것이 수건을 덮어 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살아남을 길이 없습니다.

마치 예수님이 변화산상에서 얼굴이 발광체(發光體)가 되었을 때 그 발광체의 빛을 터득해야 되는데 예수님의 제자들이 자다가 일어나서 영의 잠이 다 깨기도 전에 주 예수님의 영광의 빛이 훤하게 비추고 있을 때 영인이 된 모세와 엘리야를 보고서(마17:1~4) “주여, 우리가 초막 셋을 짓겠사오니 하나는 예수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짓겠습니다”라고 헛소리를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성전에 계실 분이지 초막에 계실 분이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엉터리 소리를 해 놓고도 자기가 무슨 소리를 했는지도 모른다고(눅 9:33) 성경에 기록 되어 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율법을 벗어나지 못하고 영적으로 보면 율법의 수건을 쓰고 있으며 또한 육체의 수건까지 쓰고 있는 것이 바로 율법에 묶여 있는 종들로서 율법으로 죄인 된 자들이므로 하나님을 두려워합니다(롬8:15). 죄가 너무 많으니까 설 자리가 없습니다. “죄인 오라 하실 때에 날 부르소서” 죽을 때까지 예수를 믿어도 죄인이란 오랏줄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율법에 매인 자들은 구제의 길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죄와 율법에서 해방하여 주었음에도(롬8:1~2, 롬7:6) 죄인 된 자들은 발광체의 빛을 가지신 예수님을 감히 쳐다볼 수가 없습니다. 발광체(發光體)의 반대는 암체(暗體)입니다. 어두운 것을 좋아하는 자들은 도둑놈이고 죄 짓는 자들이며 빛을 좋아하는 자가 하나님의 자녀인 줄 믿습니다.

모세가 수건으로 얼굴을 가림으로써 생명의 도가 가려져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빛을 받지 못하고 광야에서 장정 육십만 명이 전부 해골이 되어 쓰러져 죽고 말았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나사로의 소식을 듣고 갔습니다. “나사로가 죽은 지 이미 사흘이나 되어 시체에서 냄새가 납니다. 주님이 좀 더 일찍 오셨더라면 살았을 것을” 그때 예수님이 나사로의 무덤 앞에 가서 “나사로야! 이리 나오너라” 하니까 죽었던 시체가 벌떡 일어나 나왔습니다. 보니까 수건으로 얼굴을 싸서 꽁꽁 묶여 있습니다. 얼굴의 수건을 벗겨 주니까 눈을 깜빡깜빡하며 살아났으니 얼마나 놀랐겠냐는 것입니다.

여러분, 보이지 않는 율법의 줄에 나사로와 같이 여러분들을 꽁꽁 묶어 두었으나 오늘 이 설교를 듣고 율법에서 벗어나 해방된 자들이 되실 것을 믿습니다.

롬7:9~10 전에 법을 깨닫지 못할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

율법을 깨닫고 나서 보니까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라고 했습니다. 쉽게 설명 드리자면 여러분이 예수 믿기 전에는 죄인인 줄 모르니까 내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르는데 교회 다니다가 십계명을 안 지키면 죄가 되고 전부 열가지를 덮어 씌워 놓으니까 그 법을 알고 나서 보니 죄인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법을 알지 못할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그 계명에 이르니 죄가 살아나고 나는 죽었다.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다 하고 사도 바울이 탄식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기독교의 현실입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예수 믿지 아니하였을 때에는, 교회 가기 전에는 죄인이라 생각지 아니하였는데 교회 가니까 회개하라고 하더라구요. 잘못한 것이 없는데 무엇을 회개하냐고” 했더니 어릴 때 소꿉장난 하던 때 지었던 죄까지도 생각나게 하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죄를 없게 하는 종교가 아니고 죄를 자꾸 생각나게 만드는 기독교인 된 죄인이 있는 교회의 교인인 것입니다. 죄가 생각나지 않게 도망가게 만들어야 구원을 받게 되는데 죄가 생각나게 만드니까 죄인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죄를 생각나게 하는 십계명의 법보다 죄를 해결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광채 나는 얼굴의 비밀(빌3:21)을 깨달아야 합니다.

십계명을 깨닫지 말고 모세의 광채 나는 얼굴을 깨달아야 축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율법을 벗어난 깨달음의 축복이 있으시기를 원합니다.

고후3:14 그러나 저희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라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오히려 벗어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

예수 안에서 수건이 없어질 것입니다.

롬8:1~2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마태복음 27장 50절에 예수의 육체가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운명 하실 때에 성소의 휘장이 둘로 찢어짐으로써 수건이 벗어지고 우리가 성소에 나아가는 길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죄인이 결코 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전체가 이제는 수건을 벗은 자들로서 성소의 길, 천국의 길이 활짝 열려서 생명나무에 나아가 영생하는 귀한 축복이 있으시기를 예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