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환 칼럼] 성경의 하나님과 코란의 하나님은 같은 신인가?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언약을 세우시고 그를 믿음의 조상으로 삼으셨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이스마엘과 이삭이라는 아들을 두게 된다. 하녀 하갈로 부터 난 이스마엘은 아랍인의 조상이 되었고, 정실 사라로부터 난 이삭은 유대인의 조상이 되었다. 그러므로 이스마엘의 후손 즉 아브라함의 후손된 아랍인은 유대인을 우리 형제라고 하고, 또 유대인이 믿는 신과 동일한 아브라함의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경전에 관하여는 오늘날 코란의 이슬람교와 성경의 기독교로 나누어 존재하게 되었다. 그러면 한 하나님의 나뉘어져 다른 것인가? 기독교의 하나님과 이슬람의 하나님에 대하여 서로 다른 인식을 지지하게 된 이유는 다음과 같다.
무슬림(주: 종교명을 이슬람이라고 칭하고, 그 신자들을 무슬림이라고 칭한다)은 근본적으로 성경의 하나님과 자기들이 믿는 하나님을 동일한 하나님으로 여긴다. 그리고 무슬림은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유일하시며 초월적인 하나님으로만 믿는다. 그렇기에 인간이 알 수 없는 드러내지지 않은 신의 모습이 있다고 믿는다. 또 그러한 절대적 초월적 하나님은 인간과 더불어 교제하는 기독교의 하나님과 같은 교제는 감히 상상도하지 못한다. 일부 이슬람 신비주의에서는 성육신의 개념이 있기도 하나, 대다수 무슬림에게는 하나님의 성육신이나 고통받는 하나님의 개념은 생각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초월적이며 절대적인 하나님이 스스로 고통받는다는 개념은 제왕적 하나님의 권위와 너무나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이슬람은 구원자 되신 하나님을 필요로 하지도 않는다. 다만 무슬림에게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것은 그들을 하나님의 가르침대로 살도록 인도할 선지자가 필요한 것이지 제왕적이고 초월적인 하나님이 직접 인간을 대면하며 구할만한 일에는 친히 나서지 않을 것으로 믿기 때문이다. 이렇게 이슬람이 인식하는 하나님은 너무나 권위적이고 다가가기 어려운 초 절대적 유일신이기 때문에 이런 하나님의 특성에 근거한 해석은 기독교의 아버지 하나님과 다른 여러 면에서 큰 차이를 나타내고 있다.
이슬람의 제왕 같은 하나님은 그가 백성에게 사자는 보낼지언정 스스로는 움직이지 않는다. 비록 이슬람의 하나님도 인간을 사랑하지만 그 사랑은 선지자를 통하여 나타나지 직접적으로 그 사랑을 나타내지는 않는다. 이런 개념이 무슬림으로 하여금 성육신을 거부하게 하고 있다. 기독교의 성육신에는 두 가지 중요한 개념이 포함되어있다. 그 첫째가 구원에 필요한 과정이다. 죄에 빠진 인간은 스스로를 구원에 이르도록 이끌 수 없는 지경이 되어버렸기에, 인간된 하나님 자신이 오셔서 회복을 시켜주셔야 한다. 그렇기에 구원자가 필요하고 성육신하신 하나님이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이슬람의 하나님은 그 일을 직접하지 않고 대신 선지자를 보낸다. 따라서 이슬람의 입장에서 예수는 단지 선지자요, 그가 한 선지자이기 때문에 그들에게도 중요한 인물이다. 그러나 그뿐이지 여기에 하나님의 개념을 더할 수는 절대 없는 것이다. 두 번째 중요한 개념이 친밀한 교재이다. 기독교의 하나님은 삼위일체의 하나님이다. 삼위는 인간이 온전히 이해 할 수 없는 신비이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삼위 간에 절묘한 교재 즉 하나이면서 셋이고, 셋이면서 하나인 교재를 나누고 사랑을 나누신다. 그런 교재를 하나님은 피조물 인간에게도 적용하사, 당신과 원하는 교재를 나누고자 성육신하신 것이라고 기독교는 믿는다. 기독교의 하나님은 냉정한 하나님이 아니라 삼위일체를 통하여 사랑의 커뮤니티를 이루고 계시기에 동일한 방식으로 인간도 지으시고 그 커뮤니티 안에서 사랑으로 관계하시기를 원하신다. 따라서 그 교제 안으로 초대하신 예수님은 당연히 하나님이 되셔야만 했다. 그러나 이슬람에게 있어서 삼위일체 교리란 바울과 기독교의 교부들이 구약성경과 선지자 예수를 왜곡하고 신화를 접목하여 만들어낸 부정한 이야기라고 여긴다. 무슬림들에게 하나님에 관한 믿음은 결코 그들과 직접 교재를 나눌 그렇게 가벼운 제왕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직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온전한 가르침을 전해주는 선지자 모하멧만이 필요한 것이 된다. 이렇게 관점을 비교하면 하나님에 대한 기본적인 개념차이가 기독교와 이슬람교라는 큰 차이를 만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성경의 권위에 관하여서도 무슬림학자들은 쿠란은 성경보다 늦게 나온 최종계시(나중에 나온 최신 계시, 즉 우등계시)이기에 꾸란을 해석함에 있어서 기독교의 성서적 근거(꾸란 이전의 계시, 즉 열등계시)를 배경은 수용하지 않는 입장을 취한다. 비록 꾸란의 구절에도 아브라함과 이스마엘과 이삭과 이스라엘족속들과 모든 선지자들에게 보낸 하나님과 꾸란의 알라와 차별을 갖지 않는다고(꾸란 2:136)는 기록한다. 그렇기에 동일한 하나님을 믿고 또 성경적 전통을 존중한다고는 말하지만, 꾸란이 더욱 탁월한 최종계시성에 비중을 두기에 성경은 당연히 무시하는 것이 그들의 입장이다.
사실 무슬림이 말하는 하나님과 기독교인이 말하는 하나님 사이에는 많은 어휘적 유사성이 있기에 제 3자 들을 땐 동일한 하나님을 말하고 있는 듯한 인상을 준다. 그러나 그 유사성을 넘어서면 다름이 나타난다. 소위 짝퉁이 요즘 난무한다. 구찌 가방과 짝퉁 구찌 가방은 그 유사성을 논하자면 항상 동일한 제품이라는 결론 밖에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그 것이 어떤 디자이너를 통해서 어디서 제조되었는가는 진품과 위조품으로 나뉘게 됨과 같다.
가장 근본적인 하나님에 관한 선입견을, 무슬림이 인정하는 부분에서 보면 하나님은 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제왕적인 면도 사실 있으시다. 그러나 인간에게 다가온 하나님의 모습은 꼭 그렇지만은 않다. 아담을 지으시고, 동산을 함께 거니시고,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고, 내어 쫓더라도 긍휼을 베푸시고, 아브라함의 곤경을 세세히 살피시고, 아기 없는 여인의 소원을 들어 주시고, 제물을 바치는 아브라함의 칼 쥔 손을 멈추게 하시고, 자손을 축복하시고, 무엇보다도 출6:6-8에 그려지는 구원자되신 하나님의 모습은 아무리 이슬람이 부인하더라도 인간과 교제를 원하시며 사랑 베풀기를 즐겨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이다. 하나님의 출애굽 명령을 회피하며 5번이나 핑계를 대는 모세에게도 그 하나하나를 들어주시던 모습을 보이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러한 하나님이시기에 성육신을 통해 화해로 이끄시고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최종 계시된 성경(계22:18)을 완결시키시려는 분이시다. 반면 무슬림의 하나님은 이와 결코 성육신을 하지 않고 할 일도 없고, 필요하다면 사자 마호멧을 보내며, 성경 이후에 600년이 지난 후에 코란을 필요로 하고 있다. 유사성이 진실을 말하는 것이 아님을 분별할 수 있을 때 성경의 하나님은 코란의 알라는 근본적으로 다름을 알 수 있다.
진짜 구찌가 신제품이 나오면 몇 개월 만에 짝퉁이 출고된다고 한다. 진짜가 앞서야 짝퉁이 뒤따른다. 성경이 계시되고 난후 600년 후에 하나님의 이름을 사용한 종교가 이슬람이다. 그 유사함을 두고는 동일한 하나님을 말할 수는 있겠지만, 이는 그 유사함 때문에 짝퉁을 진품이라고 말함과 같은 것이다. 하나님의 선택을 받지 못하고 쫓겨나듯 아브라함의 가정에서 나온 이스마엘의 혈통은 씨라 칭함을 받은 자녀가 아니었다(롬9:6). 그렇게 쫓겨난 그들이기에 아버지라는 말로 하나님께 부르지 못하는 것이며, 오직 약속의 자녀들은 나의 아버지라고 간증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을 멀리 아는 사람들일지라도 피조물 속에 담긴 오묘하고 조화로운 현상을 통해 하나님을 인식하게 된다. 그런데 기독교인들은 이 하나님을 성경 안에서 만난다. 바울은 골1:15 예수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했고, 히브리기자는 하나님의 본체의 형상이라고 했다. 이는 예수 안에 하나님이 계시되고 있음을 말한다. 정확히 구약의 기록을 칭하여 이것이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요5:39)이라고 예수님은 말씀 하시는대도 성경에 기록된 예수님을 부인하고 그것을 열등한 계시라고 한다면 당연히 코란의 이슬람은 기독교와는 다른 하나님을 알게 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들이 알고 있는 하나님은 다른 하나님인 것이다.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생각하게 한 가장 결정적인 사건은 부활이라고 한다. 초대 기독교인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목격했고 이를 증거했다. 무덤이 비워져 있었고, 제자들은 어느날 갑자기 바뀌어졌고, 예수를 예배했다. 부활 때문이다. 예수님은 신앙의 모범이 아니라 신앙의 대상이다. 우리는 죽은 사람을 실제 인물이라고 생각하지를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에 관하여, 예수님에 관하여 말할 때에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 안에 계시된 하나님을 말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기독교인은 예수를 살아계신 하나님으로 체험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예수를 예배하는 것을 우상숭배라고 말하며, 이슬람의 하나님과 기독교의 하나님을 같다고 말한다면 이는 이슬람이 경외하는 대상을 경멸의 대상으로 삼는 결과가 나온다. 꾸란이 조명하고 있는 하나님은 성경이 조명해주는 하나님이 아니라 가장 하나님인 척하는 우상만을 조명하고 있을 뿐이다.
약력
– 미국 플러신학 목회선교학 박사
– 전 New Hope in Oahu KM. Directo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