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모세같은 선지자로 온 예수
본문말씀 : 사도행전 3장 20~24절
또 주께서 너희를 위하여 예정하신 그리스도 곧 예수를 보내시리니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거룩한 선지자의 입을 의탁하여 말씀하신바 만유를 회복하실 때까지는 하늘이 마땅히 그를 받아 두리라 모세가 말하되 주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너희 형제 가운데서 나 같은 선지자 하나를 세울 것이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그 모든 말씀을 들을 것이라 누구든지 그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아니하는 자는 백성 중에서 멸망 받으리라 하였고 또한 사무엘 때부터 옴으로 말한 모든 선지자도 이때를 가리켜 말하였느니라
마7: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이 말씀에서 우리에게 명하는 바가 무엇인가를 알게 될 때에 큰 기쁨의 소망을 가질 수가 있고,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될 때에“주여, 주여”하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될 줄로 믿습니다.
“주여, 주여”하는 무리가 백이든, 천이든, 만이든 하나님과는 상관이 없고 다만 하나님 뜻대로 행하는 자만이 구원 받는다고 기록되었으니 하나님의 뜻을 먼저 알고 행하는 자 되기를 원합니다.
신18:15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중 네 형제 중에서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너를 위하여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를 들을 찌니라
기록된 말씀과 같이 하나님께서 모세 같은 선지자를 세우신다고 하셨고, 하나님이 일으켜 세우는 선지자에 대하여 “너희는 그의 모든 말을 들을 찌니라”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모세 같은 선지자는 왔는지, 왔다면 모세 같은 선지자가 누구인가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신앙생활을 많이 한 사람들 중에서도 모세 같은 선지자가 왔는지 또 누구인지 문의한다면 쉽게 대답할 사람이 많지 않을 것입니다.
모세 같은 선지자가 누구로 왔는가 하면 바로 예수 그리스도로 왔습니다. 예수님이 모세 같은 선지자로 왔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습니다. 먼저 예수님이 모세 같은 선지자로 왔다는 내용을 본문 말씀을 통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행3:20~21 또 주께서 너희를 위하여 예정하신 그리스도 곧 예수를 보내시리니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거룩한 선지자의 입을 의탁하여 말씀하신바 만유를 회복하실 때까지는 하늘이 마땅히 그를 받아 두리라
영원 전부터 선지자의 입을 빌려서 이미 말씀을 하셨습니다. 왜 말씀을 하셨는가 하면 “만유를 본래 하나님의 뜻대로 회복할 때까지는 하늘이 마땅히 그를 받아 두리라” 여기에서 만유를 회복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하면 만유라는 것은 우주 공간에 있는 모든 것을 말합니수많은 천체들이 우주 공간에 있습니다. 우주 공간에 떠 있는 수많은 별들과 지구 안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대로 회복할 때까지는 하늘이 마땅히 모세 같은 선지자를 받아 두리라고 하였는데, 회복이라는 것은 타락한 세상이 하나님이 창조한 처음 것으로 다시 돌아간다는 뜻입니다. 만유가 회복되어야 한다면 무엇인가는 만유 곧 삼라만상까지 하나님 본래의 뜻과 다르게 이탈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설명 드리자면 열차가 속력이 좋고, 시설이 잘 되어 있고, 또 아름다우면 그 열차를 탈 때 기분이 좋습니다. 그런데 이 열차가 황금 열차라고 할지라도 레일을 벗어난다면 한 발자국도 다닐 수 없다는 것입니다. 모든 열차는 레일 위에 있을 때에 모든 기능을 발휘할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이 만유는 우주 공간에 있는 모든 것 곧 삼라만상을 말합니다. 육안으로 볼 수 있는 하늘과 볼 수 없는 천체까지 지구를 바라보는 모든 것이 삼라만상입니다.
삼라만상이 회복될 때까지 하나님이 보내신 모세 같은 선지자를 하나님이 마땅히 받아준다 하셨는데 그가 누구인지 보시겠습니다.
행3:20~22 또 주께서 너희를 위하여 예정하신 그리스도 곧 예수를 보내시리니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거룩한 선지자의 입을 의탁하여 말씀하신 바 만유를 회복하실 때까지는 하늘이 마땅히 그를 받아 두리라 모세가 말하되 주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너희 형제 가운데서 나 같은 선지자 하나를 세울 것이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그 모든 말씀을 들을 것이라
이 세상은 회복될 세상이고, 태초에 계신 하나님의 뜻대로 새롭게 창조될 새 세상입니다. 처음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태초를 말합니다. 태초라는 것은 첫째 날 창조 이전에 천지만물이 창조되기 수억 년 전에 하늘과 땅을 창조한 때가 태초입니다.
창1: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태초 곧 처음으로 천지(天地)를 창조하시고 천지창조 이후 6일 동안 지구 안에 인간까지 창조하시고 난 뒤에 직접 만드신 동산이 에덴동산입니다 (창2:2~8).
에덴동산은 처음부터 낙원으로 회복되지 않은 동산이었습니다. 에덴 낙원이라고도 하는데 성경 어디에서도 에덴동산이 낙원이었다는 근거는 없습니다. 그 에덴동산은 처음부터 낙원이 아니었는데 많은 사람들이 낙원으로 오해를 하고 있었습니다.
낙원이란 뜻은 즐거운 동산이란 뜻입니다. 즐거운 일만 있어야 되는데 만약 우리교회 안에 어느 지점인가는 모르지만 잘못 밟으면 지뢰가 터진다면 누가 우리 교회에 올 사람이 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아무도 교회에 들어갈 자가 없을 것입니다. 에덴동산은 이와 같이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과 같은 사망에 이르는 금단(禁斷)의 열매가 있었으니 곧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입니다 (창2:9).
에덴동산은 낙원(樂園)이 될 수가 없습니다. 오늘날까지 많은 사람들이 창세기를 읽을 때에 “선악과를 따먹지 말아라, 먹는 날에는 너희가 죽으리라.”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있었지만 아담이 타락하고 잘못해서 선악과를 먼저 따 먹었기 때문에 만 인류가 이렇게 죽음이 오게 되었다고 잘못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다음 성구를 자세히 보기를 바랍니다.
창3:3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기록된 말씀에서 하나님이 에덴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죽을까 하노라고 하였습니다. 만지기만 해도 죽게 되는 과일이 있는 곳이 낙원이라면 말이 되지 않습니다. 그런 위험한 것이 에덴동산 중앙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가 놀고 있는 방 가운데 독약이 있는 과일을 두고 만지지도 말고 먹지도 말라고 한 것과 무엇이 다르다고 할 수 있겠냐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범죄하고 죽으라고 함정을 파 놓은 것입니다. 동산 중앙의 나무의 실과는 만지기만 하여도 죽는다고 하였는데 이 실과는 무엇인가 보시겠습니다.
창2:9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기록된 말씀에서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에덴동산 중앙에 있다고 하였습니다.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만지지도 말고 먹지도 말라 죽을까 하노라고 하였으므로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선악과만 먹을 수 없는 것이 아니고 동산 중앙에 있는 생명나무 실과도 먹을 수 없도록 하나님이 예정하여 두었다는 것입니다.
또한 만지기만 해도 죽을 수밖에 없는 나무를 만들어 놓았으니 이래도 에덴동산을 낙원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여자가 선악과를 보았을 때 ➀ 먹음직하고 ➁ 보암직하고 ➂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라고 하였으니 과일나무 그 자체가 여자를 유혹하도록 하나님이 만들어 놓은 함정이었습니다.
만약 우리가 구경하러 가는 좋은 유원지에 깡패들이 우글우글 한다고 하면 아무도 갈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에덴동산에는 천하의 사기꾼인 뱀이 여자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 뱀은 어떤 뱀이었는지 보시겠습니다.
계12:9 큰 용이 내어 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단이라고도 하는 온 천하를 꾀는 자라 땅으로 내어 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저와 함께 내어 쫓기니라
기록된 말씀과 같이 여자를 꾀인 옛 뱀은 온 천하를 꾀는 자(者)라고 하였으므로 천하의 사기꾼인 것입니다. 이러한 뱀을 하나님께서 만드시고(창3:1) 에덴동산에 두어 여자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철부지 아이와 같이 옷을 입어도 입은 줄 모르고 벗어도 벗은 줄 모르는(창2:25) 아담과 여자를 온 천하를 꾀는 천하의 사기꾼이 있는 에덴동산에 두었습니다.
이는 아담과 여자가 범죄 할 수밖에 없는 환경을 만들어 주었으니 이런 불합리한 곳이 에덴동산인 것입니다.
벗어도 벗은 줄 모르는 미성년인 아담과 여자에게(창2:25) 동산 중앙에 사망의 과일과 천하의 사기꾼을 두었으니 어떻게 낙원이라고 볼 수가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만유를 회복하실 때까지는 마땅히 만세전부터 예정하신 그리스도 예수를 보내시리니”라고 한 것입니다.
아담과 여자가 타락한 것이 아니요 선악과를 따먹고 불순종함으로 지었던 인류의 원죄를 없게 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인류의 죄를 대신하여(벧전 3:18)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담의 원죄를 해결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십자가는 언제 결정해야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는 그날 “아, 이거 큰일 났구나. 자손만대에 이르는 인류의 원죄를 지었으니 수많은 사람이 죄인으로 다 죽겠구나. 예수를 속히 보내야지”하고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낼 것을 작정해야 됩니다.
그런데 아담이 불순종하여 선악과를 따먹기 전에 “아담이 선악과를 따 먹고 인류의 원죄를 발생시킬 것이니 이렇게 되면 예수를 보내야 되겠구나”하고서 만세 전에 예수님을 보낼 것을 예정하고 작정했다면 에덴동산의 사건은 아담의 불순종으로만 볼 수 있는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이 만세 전에 예정하신 사건이었다는 것을 깨닫기를 원합니다.
이런 내용을 확인할 수 있는 내용을 보시겠습니다.
고전2:7~8 오직 비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이니 곧 감취었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 이 지혜는 이 세대의 관원이 하나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
기록된 말씀에서 비밀한 가운데 있는 지혜니까 지혜 중에 지혜입니다. 만 인류의 죄 때문에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히게 하는 것을 만세 전에 정하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아담으로부터 모든 죄 때문에 십자가를 지셨는데 아담부터 예수까지는 사천 년 밖에 되지 않습니다. 아담의 범죄 때문이라면 아담의 사건 이후에 예수님을 보낼 것을 정하신 것이라고 하면 말이 맞는데 예수님이 십자가 지기 전, 만 년 전에 하나님의 감추었던 지혜로(고전 2:7~8) 정하신 것이라고 했습니다. 아담으로부터 예수님까지 사천 년 밖에 되지 않으니까 그 앞에 육천 년이 더 있어야 만세가 됩니다. 그러므로 아담이 탄생하기 육천 년 전에 이미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으면 그 죄를 회복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보내기로 작정한 이 비밀은 아무도 알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만일 알았다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고 한 것을 보아서 에덴동산의 모든 사건들은 처음부터 낙원이 아니요 회복되어야 될 동산이었습니다.
이같이 만유를 회복하기 위해서 그리스도 되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줄로 믿습니다. 어떤 선지자로 오셨는가 하면 모세 같은 선지자로 오셨습니다. 그럼 모세는 어떻게 태어났는가 하면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이 야곱을 낳고, 야곱이 열두 명의 아들을 낳았습니다.
열두 명의 아들 중 끝에서 두 번째가 요셉이었는데 요셉이 형님들이 양을 치는데 아버지의 심부름을 갔습니다. 좋은 음식을 싸가지고 갔는데 요셉이 옛날에 형님들에게 꿈꾼 얘기를 했었습니다.
“형님하고 저하고 보리를 베는데 형님 보리단이 내 보리단 보고 절을 합니다.” “이 건방진 놈. 동생에게 우리들이 절을 하란 말이냐!” 요셉이 또 한번 꿈을 꾸더니 “해와 달이 나를 보고 절을 하더니 그 밑에 열한 별이 나보고 절을 합니다.” 아버님이 가만히 생각해보더니 “이놈아, 네 아버지와 어머니가 너에게 절을 하란 말이냐? 열한 형제도 너에게 절을 하란 말이냐? 이놈 교만한 놈 같으니라고.”하며 호통을 쳤습니다.
그런데 형들이 양을 칠 때에 마침 요셉이 혼자 음식을 가지고 형들을 찾아오는데 “저 봐라. 열한 별이 자기에게 절하라고 한 요셉이가 색동옷을 입고 저기 온다. 저놈을 잡아다가 죽여 버리자” 그래서 잡아서 죽이기로 작정하고 있다가 깊은 웅덩이에 빠뜨려 놓았는데 마침 애굽으로 지나가는 상인들이 있었습니다. 그래도 우리의 형제니 죽이지는 말자 하고 종으로 팔아버린 것입니다.
종으로 팔려간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되고 이스라엘 땅에 기근이 들었을 때에 요셉의 형제들이 애굽에 양식을 구하러 갔다가 총리가 된 사랑하는 요셉을 만났습니다. 그때 야곱의 온 가족 칠십 명이 기근에서 살아남기 위하여 애굽 땅에 들어갔습니다.
사백 삼십 년이 지나는 동안에 장정만 육십만 명이 되었고 어린아이들도 많았습니다. 또 여자도 육십만 명이나 되어서 일백오십만 명에서 이백만 명이 가까운 사람들로 인구가 불어났습니다. 그때에 모세가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서 “너는 저 이스라엘 백성들을 노예에서 해방시켜라” 해서 모세가 애굽에 있는 이스라엘 민족을 해방시켰습니다.
애굽의 바로왕이 생각하기를 “이스라엘 민족들의 수가 많아지니까 다른 족속들이 쳐들어올 때에 합세한다면 우리나라가 망할게 아닌가, 그러므로 히브리 민족은 아들을 못 낳게 하자. 못 낳게 하는 방법이 뭐냐, 저녁에 부부간에 잠을 못자도록 중노동을 시키자” 그래서 벽돌 굽는 작업을 시키면서 재료는 주지 않고, 재료 있을 때와 같이 똑같은 분량의 벽돌을 구우라고 명령했습니다.
그 명령을 듣지 않는 자는 가죽 회초리로 두들겨 패고, 감옥에 쳐넣고 하는 고난과 고통을 주니까 몸이 아프고 피곤해서 아기 낳을 시간이 없었습니다.
그래도 아기를 낳으면 남자 아이는 하수에 집어 던지고, 여자를 낳으면 살려주었습니다. 산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이라 히브리 여인들이 낳은 남자들을 살려주었습니다. “죽이라고 했는데 왜 살려줬느냐?” “히브리 여인들은 건강해서 아기 낳는 소문을 듣고 가면 도착하기 전에 벌써 아기를 낳아버렸으니 어떡합니까?”
아기들이 점점 불어나자 바로는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때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호소하는 기도소리를 듣고 선지자 모세를 애굽으로 보냈습니다. 모세가 애굽 땅에 갔을 때에 많은 어린아이들이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모세가 애굽에 있는 이스라엘 민족을 해방시키는 해방자로 탄생되었습니다. 모세가 아기로 탄생되었을 때는 모세 자신도 사내아이니까 하수에 던짐을 받아야 되는데 어머니가 아기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게 하려고 석 달을 숨겨 키웠는데 울음소리가 커지니까 울음소리를 감출 길이 없어서 갈대 상자를 만들어서 그 속에 아기를 넣고 물가에 버렸습니다.
마침 바로의 공주가 강가에 놀이를 나와서 보니까 갈대 속에서 아기 울음소리가 나서 아기를 발견한 다음에 말하기를 “보나마나 히브리여인의 아기로다”하며 아기를 건졌습니다.
공주가 건져낸 갈대 상자를 열어보니 사내아이가 울고 있었습니다. 그 아기가 모세인데 물에서 건졌다고 해서 모세입니다. 그러나 모세의 어머니는 아기 모세를 잊지 못해서 딸과 함께 숨어서 아기가 담겨있는 갈대상자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하늘이 도왔는지 공주가 시녀를 보고 “어디 가서 유모 좀 구해 오너라” 고 했을때 숨어 있던 모세의 누나 미리암이 유모를 구하는 시녀에게 붙들린 것입니다.
“당신 누구냐?” “강가에 놀러 나왔습니다.” “아기를 우리 공주님께서 물에서 건지셨는데 네가 좀 유모를 구해줄 수 있느냐?”이에 미리암은 어머니를 유모로 소개하여 모세의 어머니까지 모세의 유모가 되어서 바로 궁전에 들어갔습니다. 어머니가 속으로 얼마나 기뻐하였겠습니까?
하늘이 지켜주신 축복인 줄로 믿습니다.
아기는 점점 자라면서 지혜롭고, 총명하여 공주는 모세를 자기의 아들로 삼았습니다. 모세는 성인이 되고 나서 자기가 히브리인인 것을 알고 “온 백성들은 저렇게 매를 맞아가면서 벽돌을 굽는데 나는 이렇게 궁전에서 평화롭게 잘 살수가 있겠느냐?” 그런 슬픈 마음이 있을 때 히브리인과 애굽 사람이 싸움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를 지켜본 모세가 화가 나서 그 애굽 사람을 쳐 죽여 버렸습니다. 또 다음날 갔더니 이번에는 다 같은 히브리인 끼리 싸움이 붙었습니다. 이를 본 모세가 “이런 어려운 판국에 같은 민족끼리 싸울 수가 있느냐?” 그러자 한 히브리 사람이 “이놈아, 어제는 네가 사람을 죽이더니 이제는 나를 또 죽이려 하느냐?” 소리쳤습니다.
이에 모세는 미디안 광야로 도망가서 양치는 생활을 40년 동안 하고 하나님께 부름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해서 모세는 애굽으로 피난을 갔고, 그가 태어났을 때에 아무 죄 없는 어린 영아(嬰兒=3세이하 아기)들이 태어나자마자 사내아이라는 이름 때문에 죽어갔습니다.
예수님도 태어나자마자 동방박사들이 와서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데가 어디뇨?” 라고 말함으로서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던 헤롯이 베들레헴을 중심으로 해서 만 두 살 이하의 영아(嬰兒)들을 다 죽였습니다.
박사들이 꿈에 지시를 받아서 돌아가고 요셉과 마리아는 동방 박사가 보내준 예물을 여행비로 삼아서 아기 예수님과 함께 애굽으로 피난을 갔던 것입니다. 모세도 바로 궁전으로 영아로서 피난했습니다.
모세와 예수님은 어쩌면 그렇게 어릴 때의 노정이 같을 수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3:22~24 모세가 말하되 주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너희 형제 가운데서 나 같은 선지자 하나를 세울 것이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그 모든 말씀을 들을 것이라 누구든지 그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아니하는 자는 백성 중에서 멸망받으리라 하였고 또한 사무엘 때부터 옴으로 말한 모든 선지자도 이 때를 가리켜 말하였느니라
기록된 말씀과 같이 예수님은 영적 모세로 이 땅에 왔습니다. 모세의 말은 성경에 예언된 하나님의 약속인 줄로 믿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살인자입니다. 들어가면 잡혀 죽을 것이고 입이 둔해서 말을 잘 하지 못해 애굽 땅에 갈 수 없으니 저 말고 다른 사람을 보내십시오.”
오늘날 비슷한 개꿈만 꿔도 하나님으로부터 신 받았다고 나서려고 난리인데 모세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직접 나타나셔서 “모세야, 모세야 네가 선 땅은 거룩하니 신을 벗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목소리를 듣고 모세가 신을 벗고 갔습니다. “너는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해라” “저는 말을 할 줄 모릅니다.” “네 형 아론이 있지 않느냐. 내 말을 네 입에 두리니 걱정 말고 가거라” “못갑니다. 뭐라도 보여 주십시오.” “네 손에 있는 양을 치는 지팡이를 던져보아라.”
지팡이를 던지니까 지팡이가 뱀이 되어서 모세에게 덤비자 “뱀을 무서워 피하지 말고 뱀 꼬리를 잡아라.” 뱀 꼬리를 잡으니까 지팡이가 되었습니다. “이제 알겠느냐, 이런 능력이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니까 가거라.”
그래서 모세는 애굽 땅에 가서 10가지 재앙의 이적을 애굽 땅에 저주로 내렸고 포악한 애굽 왕이 모세에게 항복을 했습니다. 430년 동안 애굽의 깊은 흑암 속에서 하나님을 알지 못하였으며 하나님은 선지자를 보내지 않았습니다.
애굽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영안이 열리지 못한 백성이었으며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조상도 알지 못하는 캄캄한 밤중에서 삶을 이어갔습니다. 선지자가 없는 어둔 밤 430년의 잠을 깨고 “아,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었구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셨고 살아 역사하셨구나, 우리를 애굽의 종살이에서 구원하는 모세가 오셨구나” 라고 해서 모세 선지자를 따라서 출애굽 하던 그날 저녁에 일년 된 수컷 양을 잡았습니다.
그리고 양고기를 먹되 그 피를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고 그것을 바르지 않는 집은 내가 사람으로부터 짐승에 이르기까지 장자를 다 죽일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가 받은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서 일년 된 수컷 양, 총각 양을 잡았습니다.
총각 양은 암컷 양을 알지 못하는 수컷 양입니다. 총각 양을 잡아서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고 문설주와 인방에 피를 발랐습니다. 그 피로 인하여 사망의 사선을 넘어간 것을 유월절이라고 합니다. 그 유월절 양고기를 먹은 사람의 집에는 장자가 죽지 않았고 애굽의 장자는 다 죽었습니다.
바로의 아들 장자부터 시작해서 종의 장자에 이르기까지 또 모든 짐승들의 장자가 다 죽었는데 애굽의 온 땅에 호곡 소리가 나지 않은 곳이 없었더라고 한 것을 보아서, 말세에 있을 무서운 애굽의 심판을 하나님이 앞서 보여주신 것인 줄로 믿습니다. 이는 말세 심판의 그림자입니다.
고전5:7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어 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
구약시대에는 죄를 지으면 사람을 대신해서 짐승 양을 잡아 제사를 드렸는데 여기에는 세상 만민의 죄를 위하여 우리의 유월절 양이 되신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다고 했습니다. 유월절 양 잡는 날, 양은 잡지 않고, 예수 양을 잡아버렸습니다. 이런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아들 예수, 사람 양을 잡은 것입니다.
일 년 된 수컷 양, 암컷 양을 알지 못하는 순수한 숫총각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서 희생양이 되신 줄로 믿습니다.
유월절 양을 잡을 때 초저녁에 잡았는데 예수님도 십자가에 달려서 초저녁에 운명하셨습니다. 왜 그러는가 하면 예수님이 유월절 양이기 때문인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해방시킨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모세의 역사가 예수님과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기를 원합니다.
모세란 이름의 뜻은 물에서 건졌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이란 바로의 강물에(겔29:3) 빠졌습니다. 악어가 우글거리는 애굽의 저주의 강물에 빠져서 하나님의 아들이 될 하나님의 백성들이 전부가 종이 되어서 벽돌을 굽는 노예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 노예의 종에서 이스라엘을 해방시킨 자가 모세였던 줄로 믿습니다.
해방시켰을 때에 바로왕의 장자가 죽고 나니까 모든 것을 포기하고 “너희들의 제물과 있는 것을 다 가져가거라. 짐승도 너희들이 좋아하는 것으로 다 가져 가거라.”
장정만 육십만 명, 여자가 육십만 명, 어린아이까지 해서 약 이백만 명 되는 사람들이 한 번에 애굽을 빠져 나올 때 그냥 나오지 않고 소와 양 그리고 짐승들을 다 몰고, 살림살이를 어깨에 메고, 출애굽 하는 그 장관을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만약에 우리 교인 천여 명이 2박3일간 소풍을 갔다 온다 해도 난리가 날 정도일 텐데, 이백만 명을 인솔한 모세는 하나님께 기도하여 하늘의 만나와 메추라기로 그것도 사십 년 동안 돌아다니며 히브리 민족을 먹여 살렸습니다. 광야에는 산과 바위, 물 없는 골짜기만 있을 뿐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걸어갔던 광야의 길을 제가 성지 순례때 가 보았는데 전부 황무지고 사막이었습니다. 산은 있으되 나무는 없고, 골짜기는 있으되 물은 없고, 시내는 있으되 메마른 가시덤불뿐이었습니다.
사람이 살 수 없는 황막한 땅입니다. 거기서 무엇을 먹고 살겠으며 얼마나 고생을 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 광야생활을 거쳐나온 것입니다.
이 엄청난 광야의 길이 바로 예수님의 노정이었습니다. 예수님이 희생양이 되셨습니다. 유월절 어린양이 되셔서 우리 인류를 죄에서 해방시키신 줄로 믿습니다.
모세는 애굽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노예에서 해방시켰고 예수님은 우리를 죄에서 해방시키신 것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기적 같은 말씀입니다.
고전10:1~2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바다를 지나간 것을 세례받은 것으로 간주했습니다. 그러므로 구약시대의 세례는 육십만 명이 하루 만에 다 받았습니다.
고전10:3~4 다 같은 신령한 식물을 먹으며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목이 말라서 물을 달라고 했습니다. 광야의 메마른 땅에는 물이 없습니다. 아무데도 물이 나올 곳이 없었습니다. 그때에 모세는 하나님의 명령대로 반석을 두 번 치니까 반석에서 물이 솟구쳐 솟아나서 60만 명이 그 물을 다 먹고 짐승들도 다 먹었습니다. 이 반석은 곧 그리스도 예수라고 비유하였습니다.
생수의 물이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만 인류가 구원받을 수 있는 영적인 가나안 땅, 천국 노정의 생수가 그리스도로부터 샘솟게 된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해서 가나안 땅에 가는 노정이 천국 가는 길입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갈 때 맨 마지막에 건너는 강이 요단강입니다. 그래서 장송곡에 “며칠 후, 며칠 후 요단강 건너서 만나리” 그것이 바로 천국 가는 노정을 비유한 것입니다.
실상적으로 요단강을 건너서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닙니다. 모세의 노정은 천국의 노정이기 때문입니다.
므리바 반석을 쳐서 온 이스라엘과 짐승들이 다 물을 먹은 것 같이 그 반석이 예수님인데 물이 없는 영적 광야에서 샘물이 샘솟게 하는 반석을 치는 자가 있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우리는 육십만 명이 아니라 온 인류가 구원받을 수 있는 생명수를 얻을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생수는 실상의 땅에서 나오는 지하수의 우물이 아닙니다.
요7:38~39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 고로 성령이 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그리스도가 십자가를 지신 후 오순절 날 성령이 임했습니다. 그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고 했습니다.「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 고로 성령이 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이 아직 저희에게 없을 때에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오순절 이후 불같은 성령이 임하고 또 진리의 성령이 임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요일5:7 증거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
요17:17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이러한 입장에서 본다면 하나님의 말씀 생수가 솟아나는 그곳이 바로 예수님이 계신 바위에서 솟아나는 생수의 말씀인 줄로 믿습니다. 이런 말씀이 세계만방 곳곳에서 교회 교회마다 생수의 물이 솟아나 온 인류가 구원받을 하나님의 약속을 비유의 말씀으로 축복되기를 원합니다.
이렇게 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해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영적인 홍해 바다는 세례입니다. 예수님이 물세례를 받으시고 또 하나님의 백성들이 세례를 받아서 육신적인 홍해 바다를 건너갔는데, 비유로 말하면 예수님의 노정을 모세의 노정으로 또 모세의 노정을 예수님의 노정으로 비유한 것입니다.
출5:22 모세가 홍해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매 그들이 나와서 수르 광야로 들어가서 거기서 사흘 길을 행하였으나 물을 얻지 못하고
기록된 말씀은 “수르광야” 의 생수의 기적을 말하는 것입니다. 광야는 햇빛이 강하고, 온도가 40도 이상 50도에 이르는 아주 더운 황무지의 삭막한 사막입니다. 이러한 곳에 물이 없다면 얼마나 목마르겠습니까?
수르광야에 들어가서 사흘 동안 물을 먹지 못해서 전부 목말라 죽을 지경이었습니다. 마치 사막의 풀이 시들어 죽은 나무가 된 것 같은 것입니다.
출15:23 마라에 이르렀더니 그 곳 물이 써서 마시지 못하겠으므로 그 이름을 마라라 하였더라
가보니까 물이 있긴 있는데 먹을 수 없는 물입니다. 써서 먹을 수가 없습니다. 쓴 물은 죽음의 물입니다(계 8:11). 써서 물을 먹을 수 없으므로 모세가 한 나무를 지적했습니다.
출15:24~25 백성이 모세를 대하여 원망하여 가로되 우리가 무엇을 마실까 하매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한 나무를 지시하시니 그가 물에 던지매 물이 달아졌더라 거기서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법도와 율례를 정하시고 그들을 시험하실쌔
이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죽을 수밖에 없는 쓴 물의 수질을 바꾼 것입니다. 먹을 수 없는 물을 먹을 수 있는 생수로 바꿨습니다.
바리새인들이 하는 그 말은 쓴 물이었으나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생수의 말씀인 줄로 믿습니다. 오늘날 이 시대에도 설교의 대부분이 세상에 속한 교훈의 말씀으로 쓴 물입니다.
살기 어렵고 힘들어서 교회에서 기도하고 은혜를 입으려고 왔는데 설교의 내용이 헌금을 하지 않으면 도둑놈이라고 하고 헌금을 많이 내야지 복을 받는다는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생활이 어려워서 차비도 없이 겨우 교회에 왔는데 헌금 설교만 하니 가난한 백성들의 마음은 상처를 받고, 마음이 써서 그게 무슨 은혜가 되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기분이 좋고 소망을 얻으면 헌금은 알아서 할텐데 헌금 얘기나 잔뜩 하니 양심에 가책을 받아서 마음에 가시가 찔려 얼마나 입이 쓰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설명한 것입니다.
그런데 모세는 쓴 물을 단 물로 바꾸었습니다. 악독한 수질을 생수로 바꾼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달고 오묘한 물인 줄로 믿습니다. 생활이 어렵고 힘든 백성에게 용기와 힘을 주는 달고 오묘한 생수의 말씀을 주어야 합니다.
요4: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찌니라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한다는 것은 신령한 말씀이 있을 때 내 마음이 진정한 마음이 가는 것입니다. 세상 이야기는 어디서도 들을 수 있고 인간 지식으로 가르친 말이라서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면 마음이 신앙을 향한 진정으로 갈 수가 없습니다. 신령한 생수의 말씀이 있을 때에 진정한 예배를 드릴수 있다는 것을 깨닫기를 원합니다.
요4:14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그런데 모세는 물 사건 때문에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됩니다. 이것도 하늘이 정하신 것이겠지만 왜 그랬는가 하면 하나님의 백성이 모세에게 물을 달라고 하며 모세를 원망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많은 기사와 이적을 보았고 또 애굽에서 수많은 기사와 이적을 보았습니다. 홍해 바다가 갈라지는 기사와 이적을 직접 체험 하였고 하늘에서 만나가 쏟아지며 아침에 자고 일어나면 메추라기, 고기가 산더미같이 쌓여 실컷 배불리 먹도록 보여주고 했습니다. 그런데 모세를 원망하고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하니까 얼마나 마음이 상하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모세가 지팡이로 바위를 쳐서 생수가 쏟아지게 할 때에 하나님과 자신을 불신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화가 나서 바위를 한번만 쳐도 될 것을 두 번 치니까 하나님이 “이놈아, 네가 나를 믿으면 바위를 왜 두 번이나 치느냐, 네가 진심으로 나를 믿으면 한번만 쳐도 바위에서 생수가 폭포수 같이 쏟아질 텐데 왜 성질을 내느냐, 그러니까 너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한 번 실수로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했습니다. 모압 땅에서 요단강만 건너면 가나안 땅입니다.
모압 땅에 가서 비스가산 꼭대기에 올라가 보니 요단 강물이 흘러가는 것도 보이고 가나안 땅도 보이며 수많은 평지에 하나님의 백성들이 아닌 죽고 멸망 받아야 될 일곱 족속들이 사는 동네가 보이는 그 가나안 땅을 바라보고서 모압 땅 평지에 장사지낼 때에, 모세의 눈이 흐리지 않고 귀가 흐리지 않으며 정신이 흐리지 않은 그런 상태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했습니다. “여호수아를 불러라. 그에게 안수해서 너의 사명을 받아 가나안 땅의 인도자가 되게 하라” 그래서 여호수아에게 안수할 때 성령이 강림했고 신의 감동이 있었으며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을 대신하고 모세를 대신해서 인도하신 줄로 믿습니다.
모세의 사건은 하나님이 정하신 하늘이 예정하신 사건이었다는 것을 성경으로 확인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롬9:17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로라 하셨으니
성경이 바로에게 말했다는 것은 하나님이 바로에게 말했다는 말과 동일합니다. 기사와 이적을 위해서 바로를 세웠다는 것입니다. 바로가 하나님의 백성을 놓아주지 않음으로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말을 듣지 않으니까 하루아침에 물이 변하여 피가 되고, 말을 듣지 않으니까 온 천지가 개구리 천지가 되고 온 천지에 메뚜기 떼들이 일어나서 온 산과 들판에 있는 모든 풀을 다 갉아서 없어지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이 열 가지의 기적을 만든 것이 바로 때문이며 하나님의 능력을 보이기 위해서 바로를 세웠다는 것입니다. 열 가지 재앙의 내용을 보게 되면 바로가 한 가지의 재앙을 받고 나니까 혼이 나서 이스라엘 백성을 놓아줘야겠다고 생각을 했는데,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하기를 “바로왕은 악해서 또 백성을 내어놓지 않을테니까 너는 가서 또 재앙을 내려라.”
그래서 모세가 바로를 찾아가는 동안 하나님이 앞서가서 바로의 마음속에 악한 마음을 불어넣어 모세가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는 바로를 바로 보게 만든 줄로 믿습니다. 바로의 악한 마음은 하나님이 넣어주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보이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역사가 에덴동산 사건까지 다 하나님의 작정된 계획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바로의 역사나 모세의 역사나 예수님의 역사도 만세 전에 정하신 일로써(고전 2:7~8) 예수님은 영적인 모세의 역할을 하게 됨으로써(행 3:20~24) 종말에 아버지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에 입성하는 영적인 여리고 성 곧 바벨론 성을 멸망시키는(계 18장) 새 역사도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성취가 되고, 여리고 성이 무너지고 가나안 땅을 점령해서 가나안 땅의 일곱 족속을 멸망시키고 구원하는 하나님의 축복이 있게 될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들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영적 가나안 땅에(계 20:6, 계 11:15) 들어가기에 부족함이 없는 귀한 자들로 축복되시기를 모세 같은 선지자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