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이단)이단

재림 예수 구인회의 실체

1.교단 창립 경위

자칭 재림예수 구인회씨는 충남 부여군 은사면에서 태어났으며 학력은 박태선 신앙촌의 시온 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신앙촌에서 박태선의 모든 행동을 보고 익히면서 새로운 길을 찾고 있었다. 구씨는 1967년 11월 전도관 탈퇴 신도들과 함께 장막성전 자칭 감람나무 유재열을 따르게 되었고 유재열 설교에 감동을 받은 구씨는 유재열의 여러 가지 부정행위를 알고서 전도관 박태선의 신도와 어린종 유재열의 신도 몇 명을 모아서 영등포구 구로동 동사무소 옆 2층 건물 지하실 방에서 몇 몇 신도들과 규합하여 진짜 재림예수로 합의를 보고 제자들을 만들어 포교하기 시작하였다. 마침 유재열 어린종 감람나무가 예언한 1969년 11월 1일 지구 최후의 날이 실패로 돌아가자 장막성전에서 탈퇴한 자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그러나 1971년 초 꿈 속에서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다며 재림예수를 자칭하고 독립해 나와 교회를 열었다. 구인회는 유재열을 ’18세 소년으로 나왔으니 (18놈) 마귀의 새끼 멸망의 가증한 자’라고 신랄하게 비방하고 과천 장막성전 교인들을 모아 교세가 커지자 1973년 음력 11월 10일 양력 12월 4일 태양의 7배 되는 불덩어리(42,000도)가 남태령에 떨어져 세상을 심판한 이후에 과천에 지상천국이 이루어 진다고 호언장담하였다.

 

2.천당사기꾼의 행각

영등포구 구로 2동 762의 4번지에 의자가 없는 비닐 장판을 깔고 설교단상 앞 중앙에는 태극기를 걸어놓고 강단 앞 좌측에는 예수의 사진 우측에는 구인회 자기 사진을 걸어 놓았다. 붉은 양복에 붉은 넥타이를 맨 상반신의 사진이다. 사진 아래는 “나 외에는 신이 없느니라”라고 한글로 표기되어있다. 예배가 시작되면 청색바지에 붉은 상의 양복과 붉은 넥타이를 매고 나와 곱상한 청년 예수와 같이 33세의 총각이라고 주장하고 “나 외에는 신이 없다”, “내가 곧 재림 예수다” 라고 하였다. 음력으로 1973년 11월 10일 오전 11시에 틀림없이 과천에서 지상천국이 이루어진다고 장담하고 만일 그때에 천국이 이루어지지 아니하면 자기의 몸을 시청광장 앞에 매달아서 갈기갈기 찢어 독수리 밥이 되게 하겠다고 호언장담하였다. 뿐만 아니라 양력으로 1973년 12월 4일 오전 9시에는 과천 남태령 고개에 태양의 칠 배 되는 42,000도의 불이 떨어져서 천지개벽하는 일이 이루어진 이후에 오전 11시에 지상천국이 이루어 진다고 주장하였다. 이를 확실히 하기 위하여 1973년 11월 10일의 남은 날짜를 알려주는 카운트다운의 카렌다를 만들어 놓았다. 때가 얼마 남지 아니하였으므로 당신들이 언제 성경공부를 하여 성경을 알겠느냐 내 말만 믿으라고 호언장담하였다.

예배는 매일 오전 11시 저녁 7시에 보았고 자리는 초만원이었다. 구인회가 단상에 설 때면 신도들이 열렬한 박수를 치고 단상에 서자마자 카운트다운의 천국의 남은 날짜를 한 장 떼어내면 하루가 더 가까운 천국 날짜가 표현되며 구인회가 설교하는 단상에는 경찰 고위 간부를 지냈다는 김oo씨가 항상 함께 앉아 있곤 하였다.

주로 설교내용은 예수가 죽은 십자가는 재수없다고 하고 태극기를 하나님의 상징이라며 태극기를 걸어놓고 성경으로 태극기를 해석한다.(물론 앞 뒤 맞지 않는 엉터리 해석이다)

예배를 보지 아니 할 때는 “새마을 노래”를 틀어 놓는다. 교회 뒷자리에 쌓여있는 전도지에는 “천국은 왜 대한민국에서 음력 1973년 11월 10일에 이루어지나” 라는 제목의 책자가 쌓여있고 발행은 “새마을 전도추진회” 라고 기록되어 있다. 먹는 것은 죄가 아니라며 예배를 마치면 신도들 보는 앞에서 술을 먹으며 담배를 피운다. 신도들도 구인회 교주를 따라서 술을 먹고 담배를 피운다. 구인회 옆에는 열 두 제자의 남자 수행원과 12천사의 여자 수행원이 항상 따르고 있다.

신도들의 대부분은 박태선 장로를 따라 갔다가 재산을 탕진하고 실패한 자들과 과천 장막성전 유재열 교주의 1969년 11월 1일 최후의날 천국이 이루어지지 아니하므로 신앙의 상처를 받은 자들이 장막성전을 탈퇴하여 모인 무리들이 많다. 이들이 마지막으로 찾은 천국 복음 전도회의 교주 구인회는 이들에게는 진정한 하나님이요 예수였다. 구인회 재림예수 말을 믿고 1973년 11월 10일 오전 9시 천지가 개벽하는 날 42,000도의 불 덩어리가 과천 남태령에 떨어지기만을 기다리는 신도들은 목숨을 건 신앙들이었다.

필자는 “선데이 서울” 잡지 뒷면 전 장에 홍색 상의를 입고 청색바지를 입고 찍은 구인회 사진을 보고 ‘참 괴이한 사람이로다’ 라고 생각을 하고서 퇴근 후에 구로동 집회 장소를 찾았으며 구인회의 설교와 그들이 주장하는 내용을 직접 들었다. 퇴근후에 특별한 일이 없는 날은 계속 참석하였다. 구인회의 말대로라면 세상 끝날이 겨우 3개월 밖에 남지 아니하였으니 지켜볼만 하였기 때문이다. 내가 앉은 자리마다 볼펜으로 비닐장판 위에 “사기꾼이다! 속지말라. 1973년 11월 10일 천국은 오지 않는다”라고 기도시간에 적어 놓았다. 이를 눈치챈 교주는 설교 때마다 “독수리(마귀)가 여러분 곁에 찾아와서 앉아있다. 방바닥에 나 재림예수를 비방하는 글을 써 놓고 가는 자가 있으니 잘 살피라”고 주의 깊은 광고를 하였다. 그리고 하는 말이 독수리(사단)는 눈이 밝아 공중에 높이 떠서 2킬로미터나 되는 거리의 먹이를 총알같이 날아가서 먹이를 챈다는 것이다.

1973년 11월 10은 음력이었다. 천국날짜는 음력으로 계산하여야 정확하게 나온다는 것이다. 1973년 11월 10일을 며칠 앞두고는 구인회가 나타나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신도들은 열심이었고 설교는 구인회 제자들이 하였다. 1973년 11월 10일 손꼽아 기다리던 수 많은 신도들은 천국 가는 며칠 전부터 철야 기도하며 그날을 기다렸으나 1973년 11월 10일(양력 12월 4일)에는 구인회도 제자들도 나타나지 아니하였고 오전 11시에 태양의 7배되는 42,000도의 불덩어리가 땅으로 떨어져서 세상을 심판할 것을 기다렸으나 그날에는 아무 징조도 없었다. 천국이 이루어지지 아니하면 자기의 몸을 시청 앞 광장에매달아서 독수리 밥이 되게 하라고 호언장담하던 구인회는 바람같이 사라졌다. 구인회가 있어야 시청 앞 광장에 달아 놓든지 말든지 할 것이 아닌가?

천국날짜가 훨씬 지난 얼마 후 구인회가 다리를 절면서 나타났다. 왜11월 10일에 나타나지 아니하였느냐? 어디 갔다 왔느냐?고 신도들의 원망이 대단하였으나 구인회는 당당하게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다시 왔다고 하였으며 교통사고로 다리를 다쳤다고 하였다. 그리고 천국날짜가 연기된 이유를 성경으로 풀기 시작하였다.

구인회의 천국 날짜가 공수표로 돌아가자 많은 신도들이 떠나기로 하였지만 재산을 모두 탕진한 것이 너무 억울하여 사기로 고소하려는 자들도 있었도 미련이 있어서 구인회를 재림 예수교로 믿고 다시 따르기로 한 자들이 더 많았다.

[1975년 8월 10일 발행 주간경향의 기사내용]

경부 고속도로 서울 톨게이트를 지나 시내로 들어오다보면 오른쪽 ‘초막절’이라는 건물이 보인다. 바로 여기가 이색신흥종교인 “천국복음전도회” 본부다. 매일 새벽 때면 이곳 교회당에서 찬송가가 터져 나오고 이른바 “기적” (?)이 이루어진다…. 그는 기적을 행하는 사나이 또는 주님이라고 그의 신도들로부터 불리운다. 그의 기적(?)은 서울 뿐 아니라 지방에서도 이루어지고 있다. 전북 임실군 관촌면에는 이른바 ‘천국복음마을’ 이란 것이 있다….이하생략. 이 교회 신도들이 지켜야할 3대 사항은 ①간음하지 말라 ②도둑질 하지 말라 ③국가와 민족을 위해 충성하라 이다 신흥종교 교주인 구씨는 술은 즐겨 먹는다. 먹는 것은 어느 것도 죄가 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먹는 것에는 이렇게 아량을 베푸는(?) 이 교주는 예수가 못 박혀 죽은 십자가는 재수 없는 상징이라면서 그의 교회에 일체 걸지 못하게 하고 대신 하나님의 모습을 상징한다는 태극기만을 교회당마다 걸게 하고 있다.

[1976년 2월 22일 발행 주간 한국의 기사내용 중 발췌]

“나를 따르는 자만이 73년 12월 4일에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최후의 날’을 선포했다. 플라스틱으로 만든 1~23식의 일련번호를 새긴 원가 70원짜리 천국행 번호표와 생명보장 증명서(서기2978년까지 살수 있다함)등을 만들어 5만원에서 10만원의 헌금을 받고 팔기도 했다. “최후의 날이 오면 온 천하는 불기둥에 타죽는다”고 협박하면서 재산을 교회에 모두 바치라고 강요했다. 전국 42지부의 2천여명의 신도가 구씨에게 갖다 바친 금품은 현금에서부터 금반지 등의 패물, 가재도구까지 갖가지…. 이하생략

그러나 기다리고 기다리던 “최후의 날”인 12월 4일은 아무런 일도 없었다. 그는 구약의 하박국편에 나오는 ‘더딜지라도 기다려라 정녕 이루어지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 “더 기다리라“고만 했다. 이것은 마치 장막성전에서 전 3년반 시한부 말세를 예언했다가 최후의 날이 무사히 지나가자 다시 후 3년반의 시한부 말세론을 폈던 것과 똑같은 수법이었다. 하여튼 구씨는 예언이 허망하게 깨어진 1년 후인 1974년 9월 그는 서울 강남구 양재동 127에 있는 대지 1백 60평을 사들여 건평 40평인 시가 1천만원짜리 교회 건물을 짓고 교회를 옮기면서 이름도 “천국복음전도회”로 바꿨다. 그리고 포교방법도 설교에서 안수기도로 바꿨다. “초막절”이란 이름의 이 교회 근처에 여러 개의 천막을 쳐놓고 안수기도를 하자는 바람에 지방 신도들이 몰려와 천막에서 묵기도 해 조용하기만 하던 말죽거리가 소란해지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