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카톨릭의 진실

로마교 카톨릭은 성경에 없는 유사종교(이단)이다

수많은 교회 지도자들이 로마 카톨릭의 실체를 제대로 알지 못해 기독교의 종교개혁 이전의 근원 또는 큰집 정도로 이해하는 무지에 빠 져 있다. 오랜 세월 동안 기독교의 뿌리는 로마 카톨릭이라는 인식이 사회 전반에 이어져 왔고, 우리 자신들도 개신교 또는 프로테스탄트라 고 말할 정도로 원형은 카톨릭이라는 생각을 해왔다. 그러나, 그리스 도교는 성경과 예수 그리스도에게 뿌리를 둔 것이지, 로마 카톨릭에 뿌리를 둔 것이 결코 아니다. 로마 카톨릭은 성경에 없는 하나의 유사 종교, 다시 말해 사악한 이단일 뿐이지, 절대 그리스도교가 아니라는 것을 반드시 알아야 한다.

영국의 사회철학자이며 경제학자인 아담 스미스(A.D.Smith, 1723~1790)는 그의 명저 <국부론>에서 “로마 카톨릭은 국가 정부의 권 위와 안전에 대적될 뿐만 아니라 인간의 자유와 이성 및 복지에 대적 하는 인류가 만들어낸 가장 가공할 만한 조직체”라고 했다. 또 옥스퍼드와 캠브리지 대학의 역사학자 크레이톤(Mandell Creighton, 1843~1901)은 “로마 교회는 전혀 교회가 아니다. 조직에 있 어서 하나의 국가다. 그것도 사악한 형태의 국가 즉, 전재 독재국가.” 라고 했다. 또한 이그나티우스 사제로 불렸던 스펜서 경은 “로마 카톨 릭은 그리스도의 교회가 아니고, 마귀의 걸작품”이라고 말했다.

로마 제국에 흩어져 있던 여러 교회들 중에 하나인 작은 로마 교회 가 A.D. 300년경 거대한 로마제국의 국교가 되는 과정에서 여러 세상 종교와 혼합되어 나타난 것이 카톨릭이다. 초대교회를 계승한 정통 기 독교가 아니다. 역사를 거듭하면서 점점 더 심각하게 변질, 변형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미국의 레아(H.C Lea, 1825~1909) 교수에 의하면, 도미니칸과 예 수회파가 주동이 되어 1572년 성 바톨로메 축제일에 칼빈의 신앙노선 을 따르는 위그노에 대한 대학살은 긴 시간에 걸쳐 진행된 조직적인 학살이었다. 5만 명이 넘는 기독교인들의 피가 파리 시내를 보름이나 흘러내렸다고 할 만큼 처참했으며, 이 소식을 접한 로마 교황청은 로 마 시내의 모든 로마 카톨릭 교회에 경축의 종을 울리게 하였고, 교황 의 흉상과 박해 장면이 그려진 기념 축하 동전 제작을 명하였다.

이외에도 로마 카톨릭의 교회가 기독교인을 처형한 숫자는 너무나 엄청나서 통계조차도 불가능하다(지난 2,000년 동안 로마 카톨릭에 의 해서 희생된 기독교인은 5천만 명 이상으로 추정된다). 로마는 처음부 터 살인자로, 우리 주님을 처형한 이후로 하나님의 백성들을 조직적으 로 죽여 온 전통적인 도시다. 그 후 온 유럽과 식민지의 피로 살 쪄온 로마. 세계에서 로마보다 더 절묘한 우상으로 꽉 찬 도시는 없다. 카톨 릭은 그리스도교와 전혀 다른 바벨론의 여신사상, 태양신 숭배사상과 혼합된 로마의 신생 종교일 뿐이다.

현재 프란치스코 교황은 카톨릭의 가장 무서운 조직인 예수회의 최고급 인사다. 로욜라가 조직한 예수회(제수이트)는 루터의 개혁에 대항하는 반개혁 세력의 선두에 나섰다. 예수회의 조직은 군대 조직의 모습을 갖추고 있다. 이들은 조용한 수도원 생활에 만족하지 않고 십 자군의 만행을 그대로 답습, 선교사의 신분을 가지고 국가와 은행 합 작으로 로마 카톨릭 식민지 시대를 열었다. 로마 카톨릭은 성경에 기 초한 것이 아니고 희랍, 로마의 이교사상과 혼합되어진 카톨릭의 르네 상스에서 시작된 것이며, 예수회의 반동개혁은 인간이 만물의 중심이 되는 인본주의 사상을 가져오게 했다.

A.D. 300년경 로마의 정치 지도자들이 정치를 수단으로 그리스도 교를 로마의 종교(국교)로 삼았고 이 종교가 로마 카톨릭이다. 이것은 모두가 인정하는 역사적인 사실이다. 표면적으로는 그리스도교의 모 양새를 갖추고 있지만 이면적으로는 철저히 그리스도교를 왜곡시키 고, 훼손시키고, 무너뜨리고 대적하는 적그리스도의 정체성을 가진 것 이 카톨릭이다. 대다수 사람들의 지식에는 카톨릭도 그리스도교로 알 고 있으나 카톨릭은 절대로 그리스도교가 아니며, 그 뿌리를 베드로에 게 두고 있다고 주장하지만, 분명한 것은 로마에서 비롯된 로마의 신 생 종교일 뿐이다. 그리스도교가 오늘에 있기까지 로마 카톨릭이 얼마 나 많은 그리스도교인들을 이단으로 몰아 죽이고 잔혹한 핍박과 죄악 을 일삼아 왔는가? 저 사악한 이단 카톨릭에 얼마나 많은 믿음의 선진 들이 저항을 하였고 목숨을 잃었는가?

그렇게 지켜온 그리스도교를 교단 및 중•대형 몇몇 교회 목사들 과 연합단체에 속한 지도자급 목사들이 로마 카톨릭에 합병시켜 버린 경천동지할 만행을 2014년 5월 22일에 저질렀다. 이들의 주장은 그리 스도교가 카톨릭에서 떨어져 나왔기에 하나로 다시 ‘일치’시켜야 한다 는 무지몽매한 주장을 앞세웠다. 이 사건은 한국교회 130년 역사의 종 지부를 찍는 비극이었다. 그들은 정통 그리스도교가 로마 카톨릭에 흡 수, 병합되도록 앞잡이 노릇을 톡톡히 하였다. 이는 ‘NCCK(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가 로마의 종교이며 이단인 카톨릭과의 영적 내선일체 (內鮮一體)를 이루어 한국 교회를 로마 카톨릭의 속교로 만들려고 하 는 사악한 음모를 꾸미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명제로 로마 카톨릭과 기독교 일각에서 ‘종교간 일치 운동’을 펼치고 있다. 이것은 카톨릭이 세계종교 통합을 꿈꾸고 있는 노선에 기독교계 일부가 동조, 가담한 행위로서 결국에는 카톨릭에 흡수시켜 그리스도교를 말살시키려는 사 악한 간계가 ‘일치’ 속에 숨겨져 있다. 종교 간의 일치 운동은 표면적으 로는 맞아 보이고, 도덕과 윤리적으로는 정의로운 행동 같이 보인다. 하지만 내면적으로는 이 세상에 있는 잡다한 여러 종교들과 혼합시켜 기독교의 본질, 원형과 근간을 변모, 변형, 왜곡, 비하시켜서 기독교의 생명력을 아예 없애버리려는 사단의 사악한 간계를 내포하고 있는 것 이 종교간 일치 운동이다. 거짓된 것(카톨릭)이 구체화되어가고 저들 (카톨릭과의 ‘일치’에 빠진 한국교회 지도자들)이 옳게 여길 때 한국교 회는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는 날을 앞당기게 될 것이다.

 

카톨릭은 반기독교적인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역사적인 근거를 떠나서라도 로마 카톨릭은 교리적으로 그리스도 교라고 볼 수 없다. 아니, 도리어 그리스도교를 무너뜨리고, 왜곡시키 는 반기독교적인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카톨릭과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교단을 비롯한 NCCK는 그리스도교가 로마 카톨릭에서 떨어져 나 온 종교로, 또는 카톨릭을 큰집으로 그리스도교를 작은집으로 이해하 고 카톨릭과 ‘일치’하기로 조약을 맺고, 서명했다. 그리스도교를 변형, 변질시킨 로마 카톨릭에 항거하고 나선 개혁자들이 지금으로부터 500 년 전에 수많은 목숨을 희생당하고서 성경적인 초대교회로 회복시켜 나타낸 것이 지금의 그리스도교다.

이러한 그리스도교가 한국 땅에 발을 붙인지 130년이 된 지금, 한국교회는 다시 ‘카톨릭’으로 되돌아가는 행위를 저질렀다. 이것은 지금까지의 그리스도교 전 역사를 부정해 버 리는 반역적인 행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못에 대해 회개할 기미를 전혀 보이지 않고 굳어져 가는 것이 문제다. 더 큰 문제는 그리스도교 에 대한 반역을 저지른 당사자들에게 잘못을 지적하지 못하는 한국교 회다. 지적은 고사하고서라도 반역을 저지른 교단들과 화합, 평화라는 명목을 앞세워 연합 ‘일치’하고 있다는 점은, 한국에 있는 그리스도교 전부가 ‘카톨릭’이 모색하고 있는 종교통합에 빠져들 수밖에 없는 사슬 에 엮이는 것이다. 이 문제의 심각성에 대응하지 않는다면 한국교회는 혼합주의와 포용주의에 빠져서 복음의 근본을 저버리고 고유한 그리 스도교의 생명을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로마 카톨릭의 정체를 명확하게 밝혀 잘못 가고 있는 한국교회를 바른 길로 인도하고자 한다.

 

로마 카톨릭의 기원

3세기까지 로마제국 전역에 흩어져 있던 수많은 교회들 가운데 하 나에 불과했던 로마교회가 중세를 장악한 로마 카톨릭 교회가 되고, 지방 교회의 일개 장로에 불과했던 로마교회의 감독이 세계 교회의 머 리가 되어 중세를 호령한 것은 자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로마제국과 신성 로마제국의 정치적, 군사적 뒷받침이 있었기 때문이다.

콘스탄틴(A.D. 306-337)과 유스티니안(A.D. 527-565)은 교황을 양 육하여 중세의 주인으로 성장시킨 대표적인 황제들이다. 312년 10월 27일 콘스탄틴 황제의 꿈과 환상으로 나타났다는 ‘불붙는 광채의 십자 가’를 힘입어 적이었던 막센티우스 황제를 밀비안 다리 전투에서 이긴 뒤, 그리스도인에 대한 로마의 태도는 혁명적인 전환기를 맞게 된다.

313년 3월 ‘밀란의 칙령’이 반포되어 그리스도인들에게 신앙의 자 유가 주어지고, 성직자들에게는 병역, 세금 및 각종 시민의 의무가 면 제되고, 사법상의 특전도 베풀어져 세상 법정에서 재판을 받지 않게 되었다. 그 결과 성직제도는 빠른 속도로 타락하여 성직 매매가 성행 했고, 민중의 호응과 인기를 얻기 위해 교회의 문지방은 낮아질 대로 낮아져 세속과 이교(異敎)의 물결이 넘쳐 들어왔다. 예배는 심각하게 이교화되어 갔다. 321년 3월 7일, 콘스탄틴 황제가 페르샤의 태양신 미 트라(Mithras)의 예배일인 일요일에 휴업하라는 포고를 내렸다. 로마 교회 감독은 황제의 이러한 종교정책을 열렬히 환영하며 국가의 비위 를 맞추면서 꾸준히 정치적 기반을 굳혀 갔다.

326년 콘스탄틴 황제는 황후 파우스타(Fausta)의 라 테란 궁전을 로마교회 감독 실베스터(Sylvester)에게 주어 공관을 삼게 했다. 330년 수도를 로마에서 콘스탄티노플로 옮기게 되자, 로마교회의 감독은 황 제의 간섭 없이 독자적으로 교권을 확장하게 됐다.

375년까지 로마 황제들이 공식 호칭으로 쓰고 있던 이교 대제사장 의 칭호인 ‘폰티펙스 막시무스(Pontifex Maximus)’를 그리스도인인 그 라시안(Gracian) 황제가 사용을 중지했다. 자신을 높이기에 급급했던 로마교회 감독은 즉시 이를 채택하여, 자신의 칭호로 삼아 오늘날까지 도 교황의 공식 칭호가 되었다.
476년 서로마가 멸망한 뒤, 로마교회 감독은 황제의 이미지로 군 림하여 정치와 종교의 실권을 장악했다. 496년 게르만 민족의 강자인 프랑크의 국왕 클로비스(Clovis)를 개종시켜, 로마교회의 양자를 삼음 으로 중세의 정치적 기반을 더욱 공고히 했다. 특히 동로마 황제 유스 티니안은 로마교회 감독이 세계교회의 머리가 되게 하는데 결정적 역 할을 했다.

서로마의 잃어버린 통치권을 되찾고, 이전의 통일된 대제국을 이룩해 보려는 목적으로 황제는 로마교회의 영항력을 십분 이용하려 했 다. 유스티니안은 493년 아리안주의(Arianism) 게르만 민족으로 하여 금 이탈리아 반도와 로마교회를 위협해 온 헤루리를 정복하고, 534년 에는 같은 이유로 반달족을 정복했다.

533년 로마교회 감독을 ‘세계교회 머리’로 공식 인정하고 이 사실 을 534년에 그의 법전에 편찬했다. 538년에는 이탈리아 반도와 로마교 회 감독의 지상권에 도전하는 마지막 아리안주의 게르만족인 동고트 족을 군사력으로 정복하여, 마침내 교황권을 중세의 권좌(權座)에 앉 혀 놓았다. 그 뒤를 이어, 서유럽의 실력자가 된 프랑크 왕 피핀(Pepin 741-768)은 왕위를 찬탈한 자신에게 왕관을 씌워준 데 대한 감사로 로 마교황을 적극 후원하였다. 754년에는 롬바드에게서 빼앗은 동로마제 국의 영지를 교황에게 주어 교황령이 되게 함으로써, 로마교회는 이제 영토를 가진 국가가 되었다.

피핀 왕의 아들 찰스 대제는 군사력을 동원하여 곤경에 빠진 로마 교황을 정치적 위기에서 구원한 뒤, A.D. 800년 크리스마스에 성 베드 로 사원에서 교황 레오 3세로부터 황제의 관을 받아 역사적인 신성 로 마제국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 제국은 1806년 나폴레옹에 의해 막을 내리기까지 1,000여 년 간 교황권의 성실한 보호자 구실을 했다.

십자군을 일으켜 알비젠스, 왈덴스 등 개혁파들을 무참히 학살하고, 허스와 제롬을 불사르고, 루터의 종교개혁을 저지하기 위해 모든 편의 와 힘을 제공한 것이 바로 신성 로마제국이었다. 따라서 카톨릭은 초대 교회를 계승한 교회가 아니라 오히려 초대교회를 핍박하고, 이방종교를 흡수한 혼합종교였고, 정치적 후원으로 성장하였으며, 권력과 금력을 얻기 위해서 수단을 가리지 않는 세상적 교회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카톨릭의 비성경적 교리 역사

1. 루시안이 장로를 사제라고 처음으로 부름 ― 2세기
2. 시프리안이 사제가 집전하는 미사를 만들어 냄 ― 3세기
3. 죽은 자를 위한 기도(바빌론 종교의 풍습) ― A.D. 300
4. 십자가 형상을 만듦 ― A.D. 300
5. 촛불 ― A.D. 320
6. 천사, 죽은 성인들, 형상 숭배 ― A.D. 375
7. 미사가 매일 드리는 예식이 됨 ― A.D. 394
8. 에베소 공회를 통해 마리아를 높이기 시작하고 ‘하나님의 어머니’ 라는 칭호로 부르기 시작 ― A.D. 431
9. 사제들이 특별한 옷을 입기 시작 ― A.D. 500
10. 최후의 도유(치유를 위한 의식) ― A.D. 526
11. 그레고리 1세가 연옥의 교리 확립 ― A.D. 593
12. 예배 때 라틴어 사용 ― A.D. 600
13. 마리아, 죽은 성인들, 천사들에게 기도 ― A.D. 600
14. 최초의 교황 (보니파 3세) ― A.D. 610
15. 교황의 발에 입 맞춤 ― A.D. 709
16. 프랑크 왕 피핀이 교황에게 세속 권력을 넘겨줌 ― A.D. 750
17. 십자가, 형상, 유물 숭배 인정 ― A.D. 786
18. 소금, 기름을 섞은 물에 사제가 축성해서 성수로 만듦 ― A.D. 850
19. 성 요셉 숭배 ― A.D. 890
20. 추기경 대학 숭배 ― A.D. 927
21. 교황 요한 13세가 종에 세례를 베품 ― A.D. 965
22. 교황 요한 15세가 죽은 사람들을 성인으로 선언함 ― A.D. 995
23. 금요일과 시순절 금식 ― A.D. 998
24. 미사가 점차 희생제사로 발전하고, 참석이 강요됨 ― A.D. 11세기
25. 사제들의 독신생활 ― A.D. 1079
26. 은둔자 베드로가 묵주 사용(이교도 관행)도입 ― A.D. 1090
27. 베로나 공회 떼 종교재판소 제정 ― A.D. 1184
28. 면죄부 판매 ― A.D. 1190
29. 피터 롬바르트가 일곱가지 성사 확정 ― A.D. 12세기
30. 이노센트 3세가 화체설 확립 ― A.D. 1215
31. 이노센트 3세가 죄를 하나님이 아닌 사제의 귀에 들리게 고백하는 의식(화해의 의식) 제정 ― A.D. 1215
32. 교황 호노리우스 3세가 성병 숭배 제정 ― A.D. 1220
33. 발렌시아 공회 때 성경이 평신도들에게 금지되고 금서 목록에 포 함됨 ― A.D. 1229
34. 영국의 사이몬 스톡이 성의를 만들어 냄 ― A.D. 1251
35. 콘스탄스 공회 때 평신도들은 영성체 때 잔은 받을 수 없게 됨 ― A.D. 1414
36. 플로렌스공회 때 연옥이 교리로 확정됨 ― A.D. 1439
37. 트렌트 공회 때 교회의 전통도 성경과 동일한 권위를 가진 것으로 인정 됨 ― A.D. 1545
38. 트렌트 공회 때 외경도 성경에 포함되어야 한다고 결정됨 ― A.D.1546
39. 교황 피오 4세가 만든 신조가 원래의 사도들의 신조 대신 공식 신 조로 채택됨 ― A.D. 1560
40. 교황 피오 9세가 마리아의 무염시태(죄없이 잉태됨)를 선언함 ― A.D. 1854
41. 교황 피오 9세가 유설표를 공표하고 바티칸 공회가 인준함, 로마 카톨릭 교회가 승인하지 않는 종교, 양심, 언론, 과학적 발견의 자유를 정죄함, 교황이 세상 통치자들의 세속 권세 위에 권위를 가졌다고 인 정함 ― A.D. 1864
42. 바타칸 공회를 통해 믿음과 도덕적인 모든 문제에 교황의 절대무 오류성 선언 ― A.D. 1870
43. 피오 12세가 마리아의 몽소승천 선언 ― A.D. 1950
44. 교황 바오로 6세가 마리아를 ‘교회의 어머니’라 부름 ― A.D. 1965

 

로마교 카톨릭 교황제도

카톨릭에서는 교황을 베드로의 사도 직분을 계승, 그리스도의 대 리자, 교회 전체의 머리, 거룩한 아버지, 무오한(오류가 없는) 존재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교황의 교시를 성경보다 높게 생각한다. 교황은 역사상 많은 부도덕한 일(살인, 신성모독, 치부, 성직 매매, 술취함, 간 음, 동성연예, 근친상간)을 자행해 왔다. 중세 때는 왕을 능가하는 부와 권력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이 셀 수 없이 많다.

교황 세르기우스 3세(A.D. 904~911)는 살인을 통해 교황직을 얻 었고, 간음으로 사생아를 낳았다. 요한 12세(A.D. 955~964)는 성적으 로 문란해 교황청에 창녀들을 불러들였고 도덕적 부패가 극에 달했 다. 주교 50명이 성 베드로 성당에 모여 교황을 절도, 성직매매, 위증, 살인, 간음, 근친상간으로 고소했으나, 요한 12세는 오히려 추기경과 주교들을 채찍으로 때리고 팔과 코와 귀를 자르는 보복을 하였다. 요 한 15세(A.D. 985~996)는 교회 재정을 자기 친척들에게 나눠줘 부패 한 자라는 소리를 들었다. 베네딕트 8세(A.D. 1012~1024)는 공개적으 로 뇌물을 주고 교황직을 산 부도덕한 인물이다.

베네딕트 9세(A.D. 1033~1045)는 대낮에 살인과 간통을 자행했고, 순례자들을 강탈하다 가 추방당했다. 이노센트 3세(A.D. 1160~1216)는 종교재판소를 창 설해 성경대로 믿는 그리스도인을 백만 명 이상 살해했다. 요한 23세 (A.D. 1410~1415)는 주교와 사제로 구성된 37명의 증인에 의해 음행, 간통, 근친상간, 남색, 성직매매, 도둑질, 살인죄로 고소당했고, 300명 의 수녀들을 겁탈하였다. 바티칸 기록에 의하면 그는 자기 형제의 아 내와 변태 성행위를 자행하였고, 수백 명의 처녀들과 성관계를 가졌고, 결혼한 여자들과 간음을 행함으로써 공개적으로 악마의 화신이라고 불리었다. 비오 2세(A.D. 1458~1464)는 육욕에 빠지는 방법을 가르쳤 고, 많은 사생아의 아버지였다. 바오로 2세(A.D. 1464~1484)는 비싸고 호화로운 왕관을 쓰고, 궁전에 많은 첩을 두었다.

식스투스 4세(A.D. 1471~1484)는 교회 직분을 경매로 팔아 전쟁자금을 충당했고, 친척들 에게 치부한 돈을 나누어 주었으며, 어린 조카 8명을 추기경으로 임명하였고, 사치스럽고 화려한 잔치를 종종 열었다. 이노센트 8세(A.D. 1484~1492)는 여러 여인과 성관계를 통해 16명의 자녀를 두었고, 자 녀 중 몇 명은 바티칸에서 결혼식을 거행하였고, 교회 직분을 늘려 돈 을 받고 팔았고, 성 베드로 광장에서 투우 경기를 벌이기도 했다. 알렉 산더 6세(A.D. 1492~1503)는 추기경을 뇌물로 매수해 교황직에 선출 되었고, 품행이 나쁜 자기 젊은 아들을 발렌시아의 대주교로 앉혔으며, 자기의 두 누이와 근친상간하고, 자기의 딸 루크레티아에게서 자녀를 두었다. 레오 10세(A.D. 1513~1521)는 8세에 수도원장이 되었고, 13세 에 추기경이 되었으며, 값비싼 유흥과 연회를 통해 술 마시고 흥청망 청 놀았으며, 교황의 궁전에서 12명의 벌거벗은 소녀에게 저녁 시중을 들게 했다. 바오로 3세(A.D. 1534~1549)는 전에 추기경으로 있을 때 자녀를 두었었고, 십대의 어린 조카 두 명을 추기경으로 임명하였고, 가수와 무희와 어릿광대를 동원해 축제를 후원했고, 점성가를 불러 조언을 구했다.

 

로마교 카톨릭의 마리아 숭배

천주교는 마리아가 원죄 없이 잉태했고, 죽을 때 몸과 영혼이 하늘 로 승천했다고 한다. 마리아는 모든 사람의 어머니, 여왕, 하늘의 문이 며 그녀를 통해서 용서받는다고 한다. 자녀를 7명 이상 가진 마리아가 평생 처녀인 동정녀로 살았다고 하며 마리아를 통해서 예수님과 하나 님께 나아갈 수 있다고 한다.
A.D. 313년 로마교회가 국교화 되면서 이방종교가 금지되었으므 로 이교도들은 그들의 여신숭배 사상을 교회 안으로 가져왔다. 로마교 회는 교세확장을 위해 이를 용인했다. 점차 이교도들의 여신 숭배는 마리아 숭배로 옮겨가게 됐다.

A.D. 431년 에베소 공회에서는 마리아 숭배를 카톨릭의 공식 교리 로 채택하였다. 에베소는 고대로부터 처녀와 어미의 여신 다이아나를 숭배하던 도시였다. 사도들이 복음을 전파할 때 에베소 거민들은 스스 로 여신 우상을 파괴하기도 하였다(행 19:24~27). 카톨릭에서는 마리 아가 우리를 대신해 하나님께 기도해주는 중보자라고 하며, 마리아를 영원한 동정녀라며 평생 처녀로 지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성경에는 예수님의 4형제 아고보, 요셉, 시몬, 유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마 13:55). 또한 예수님은 누이들도 있다(마 13:56).

카톨릭은 마리아가 원죄 없이 예수님을 잉태했고, 평생 죄를 짓지 않았다고 한다. 이것이 1854년 교황 피오 9세가 선언한 마리아의 무염 시태 교리이다. 카톨릭은 마리아가 죽지 않고 하늘로 승천해 하늘 여 왕이 됐다고 가르치고 있다. 몽소승천 교리는 A.D. 1951년 교황 비오 12세에 의해 선언되었다. 천주교의 마리아 숭배는 고대 이교도들의 여 신 숭배와 다를 바가 없다.

천주교는 로사리오라고 불리는 묵주를 기도할 때 사용한다. 그런데 이 묵주는 불교에서 쓰는 염주와 다를 바 없고, 고대로부터 이교도 들이 사용하던 기구다. 수세기 동안 이슬람교도들은 염주를 사용해 알 라신에게 기도했다. B.C. 800년경 페니키아 사람들은 원형의 염주를 이용해 여신 아프로디테를 숭배했다.

 

카톨릭 성직제도와 고해성사

신부님에 대한 호칭이 서양에서는 Father로 하나님 아버지에게만 쓸 수 있는 호칭을 사용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한술 더 떠서 신부 (神父)라고 한다. 이는 하나님 아버지를 나타내는 뜻이다. 예수님은 분 명히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하나님 아버지 이외에는 종교적으로 아버 지라 부르지 말라고 하셨다.
마태복음 23장 9절 “또 이 세상 누구를 보고도 아버지라 부르지 말아 라. 너희의 아버지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한 분 뿐이시다.”

로마 교황을 나타내는 Pope란 단어도 아버지라는 의미의 단어를 조금 바꾼 것에 지나지 않는다. 로마시대에 유행했던 이방종교인 미트 라교에서는 제사를 주관하는 사제들을 아버지(Father)라고 불렀다. 또 한 미트라교 사제의 우두머리는 로마에 살았는데, 그는 ‘아버지들의 아 버지(Pater patrum)’라고 불렸다. 성경의 사사기에도 이교도의 사제를 아버지라고 부른 것이 기록(삿 17:10) 되어 있다.

카톨릭에서 교황 다음 가는 직분으로 추기경이 있는데, 성경에는 추기경이라는 직분이 없다. 추기경은 원래 로마 이교도들의 성직으로 추기경을 의미하는 Cardinal은 돌쩌귀(문을 여닫기 위해 경첩과 같이 쇠붙이로 된 물건)를 의미하는 라틴어 Cardo에서 유래되었다. 추기경 은 원래 문과 돌쩌귀의 신이던 야누스(Janus)를 모시던 사제였다.

1월을 의미하는 January도 시작의 신이란 의미를 가진 야누스에 서 유래되었다. ‘문을 열고 닫는 자’로 알려진 야누스는 로마신화에 나 오는 문의 수호신이다. 추기경은 붉은색 옷을 입는데, 이는 이교도 카 디날 사제들의 붉은 옷과 같으며, 바빌론 왕들도 붉은 옷을 입었다. 카톨릭의 교권체제는 이교도들의 대승원장(Pontifex Maximus)을 수장 으로 하고 승원장(Pontiffs)들이 그를 보좌하는 제도와 비슷하며, 이와 같은 제도는 바빌론에 있었던 승원장 공회제도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교도들은 제사를 드리기 전 사제를 세 그룹으로 나누었는데 추기경 (Cardinal)과 주교(Bishops)와 사제(Priests)이고, 이를 로마 카톨릭에서 그대로 수용했다. 카톨릭의 대주교(archbishop), 대사제(archpriest) 등 에서 ‘arch’는 지도자 또는 선생이란 뜻이 있다.

마태복음 23장 10~11절 “또 너희는 선생이라고도 불리지 말라. 이는 너희 선생은 한 분, 곧 그리스도시기 때문이라.”

 

로마교 카톨릭의 우상숭배

카톨릭 교회는 희랍과 로마의 다른 종교 숭배자들이 그들의 상상 적인 신들에게 존경과 신앙심을 표현하였던 종교의식들과 제도들을 조금씩만 고쳐서, 예배에 첨가했다. 이렇게 함으로써 이교도 신자들로 하여금 이런 의식들은 자기들의 조상들로부터 전래(傳來)된 것으로서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서도 바뀐 것이 없이 그대로 존재하고 있는 것으 로 인식하게 하고, 그리스도와 순교자들도 이전에 자기들의 신들이 경 배 받았던 것과 같은 방법으로 예배되고 있는 줄로 안다면, 그들이 더 욱 쉽게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콘스탄틴 황제가 자기 조상의 종교를 포기하자마자, 곳곳에 으리으리한 성전들 이 서게 되어, 여러 가지 그림들과 우상들로 치장되었는데, 이것들은 외관으로 보나 내면으로 보나, 이교 신들의 신전과 흡사한 것이었다.

8세기 카톨릭 교회들은 각종 성상들로 가득 차게 되었다. 이것들 에 입 맞추고, 기도하고, 분향하고, 절하는 일이 지나쳤고, 오히려 이런 우상을 섬기지 않는 회교도들로부터 우상숭배자라는 조롱을 받는 등 그 퇴폐함이 극에 달했다. 보다 못한 동로마 황제 레오 3세와 콘스탄티 노플 대주교 등은 종교회의를 열어 우상 숭배를 금하고 교회당에서 이 를 제거할 것을 명하고 강제로 부수기까지 했다. 그러나 교황 그레고 리 3세는 우상의 사용을 적극적으로 옹호하고 나섬으로써 동서(東西) 교회는 장기간에 걸친 논쟁과 분쟁으로 들어섰다. 심지어 로마교회의 일각에서는 “하나님은 성만찬에서와 마찬가지로 만들어 놓은 우상에 도 임재하신다. 그려지거나 묘사되지 아니한 그리스도는, 실제의 그리 스도가 아니다.”라고 주창하기에 이르렀다(Qualben, 153, 153).

이것이 그 유명한 ‘성상 파괴 논쟁(Iconoclastic Controversy)’인데 우상에 대한 로마교회의 견해는 지금도 그때와 변함이 없으며, 지금의 바티칸 성 베드로 성당에도 395개의 성상과, 44개의 제대(祭臺)가 차 려져 있다.

 

① 오벨리스크 숭배

성 베드로 성당의 오벨리스크
성 베드로 성당의 오벨리스크

오벨리스크는 고대 종교의 상징물로 전 세계에 분포되어 있다. 오 벨리스크는 이집트 신화에서 유래됐는데 여신 이시스의 남편 오시리 스의 성기를 의미한다. 오벨리스크는 또한 태양신을 상징한다. 명백한 이교도들의 상징물이 로마 바티칸 성당 앞마당 한복판에 있는 것이 놀 라운 일이다. 더구나 이 오벨리스크는 모조품이 아니라 이집트에 있던 고대 유물을 직접 가져온 것이라고 한다.

A.D. 37~41년에 로마 칼리굴라 황제는 이집트의 헬리오폴리스에 있는 오벨리스크를 바티칸 언덕의 원형경기장으로 가져왔다. 헬리오 폴리스는 고대 이집트 태양 숭배의 근거지였다. 바티칸에 있는 오벨리 스크는 높이가 24m이며, 기초까지 합치면 40m이고, 무게는 무려 320톤이나 나간다. A.D. 1586년 교황 식스투스 5세의 명령으로 오벨리스 크를 성 베드로 성당의 앞마당으로 옮겼다. 많은 사람이 거대한 오벨 리스크를 옮기는 일을 거부하였는데, 그 이유는 교황이 오벨리스크를 옮기다가 떨어뜨려 깨뜨리는 사람을 사형에 처하기로 하였기 때문이다.

결국 폰타나라는 사람이 책임을 맡고 45개의 감아올리는 기계와 180마리의 말과 800명의 작업 대원을 이끌고 과업을 수행했다. 1586년 9월 10일 많은 사람이 지켜보는 가운데 오벨리스크는 운반되었고, 성 공적으로 세워지자 수백 개의 종소리와 대포 함성이 울려 퍼졌고, 군 중은 환호성을 질렀다. 교황청은 이집트 우상 꼭대기에 십자가를 안치 함으로써 신성 모독적인 일을 자행하였다. 오벨리스크가 세워진 후 교 황은 미사를 거행하였고, 작업 대원과 말들에게 복을 선포하였다. 성 베드로 성당 광장 주위에는 248개의 도리스식 기둥이 세워져 있는데, 이런 건축양식은 이교도들의 신전 설계에 사용되는 것이다.

 

② 태양 숭배

성체안치기(monstrance)
성체안치기(monstrance)

태양신을 숭배하는 미트라교의 제사장들은 태양원반 형태의 빵을 사용했다. 성병(聖餠)과 짝을 이루는 성체안치기(monstrance) 역시 태 양원반의 형태를 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태양에서 발산되는 햇살을 연 상시키는 문양으로 꾸며져 있다. 성체(Host)란 화체설(化體說)에 근거 하여 그리스도의 몸으로 변화된 성병을 구별하여 지칭하는 단어다. 미 사를 집전하는 사제는 소위 성체로 변화된 성병을 성체안치기에 올려 놓는다. 그러면 미사에 참여한 신도들은 그것을 하나님으로 여기고 숭 배한다.

로마시대의 대표적인 이방종교인 미트라교에서는 태양을 숭배했 다. 이러한 태양 숭배의 영향을 받아 성찬에서 쓰이는 성병도 동그랗 게 만들어졌다. 고대 이집트의 신비종교에서도 사제들이 태양신에게 둥근 빵을 재물로 드렸다고 한다. 성병에 새겨진 IHS는 이집트의 삼위 일체신 Isis, Horus, Seb을 의미한다. 성체를 모시는 성체헌사대는 좀 더 적나라하게 태양 햇살까지 표시되는 문양을 가지고 있다. 성 베드로 성당 중앙 제단에는 뱀처럼 꼬인 기둥 사이에 빛이 들어오는 태양 형상이 있다.

바빌론에서 태양신을 숭배하는 제단에도 이러한 형태의 금으로 만 든 태양 형상을 가지고 있다. 이집트에서는 건축가들이 신전에 태양 문양을 새기는 관습이 있었는데, 태양신이 악령을 쫓아 준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고대 사람들은 커다란 수레바퀴가 태양을 상징한다고 믿었 고, 태양신이 수레를 몰고 다닌다고 생각했다. 이스라엘도 바알과 태 양신과 달과 행성에게 분향하던 제사장이 있어 요시아 왕이 이를 개혁 한 적이 있다(왕하 23:5). 바빌론의 벨 신전에서는 8개의 살을 가진 태 양신을 상징하는 수레바퀴가 발견되어 현재 영국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와 유사한 수레바퀴 문양이 성 베드로 성당의 앞마당에도 오 벨리스크를 중심으로 버젓이 새겨져 있다. 카톨릭의 성화 속 인물의 머리 주위의 밝은 원과 수도승의 로마식 둥근 삭발도 태양신 숭배와 관련이 있는 것이다. 이 밖에도 찬란한 제복, 촛불, 종, 향, 음악 등이 모두 이교도의 풍습과 관련이 있다.

 

우상숭배 금지를 제거한 카톨릭 십계명

바티칸 성당은 온갖 우상으로 불교의 사찰(寺刹)을 방불하게 하고 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가진 로마교회가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 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출 20:5)는 둘째 계명을 좋아할 리가 없고, 첫째 계명에 포함되었다는 애매한 이 유를 붙여 삭제해 버렸다. 우상숭배에 관한 둘째 계명이 삭제됨으로, 한 조항이 모자라게 된 것은 그것이 다른 사람의 아내나, 종이거나, 혹 은 소유를 막론하고 탐심을 갖지 말도록 명한 열 번째 계명을 둘로 나 누어, 결국 천주십계(天主十誡)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과 로마교 카톨릭의 기독교 박해

네덜란드의 화가 이싱스(J.H. Isinghs)가 그린 <1521년 신성로마제국 국회 석상의 루터>
네덜란드의 화가 이싱스(J.H. Isinghs)가 그린 <1521년 신성로마제국 국회 석상의 루터>

유물과 교회 직책, 면죄부를 파는 일은 중세의 로마 카톨릭의 큰 사업이었다. 교황 보니파스 8세는 A.D. 1300년을 희년으로 선포하였 고, 성 베드로 성당까지 순례를 하는 사람에게 면죄를 허가했다. 그 해 에 이백만 명이 로마로 몰려들었고, 성 베드로의 무덤이라는 곳에서 두 사제는 돈을 갈퀴로 긁어모았다. 교황은 이렇게 모은 돈을 친척들 에게 나누어 주었고, 많은 성과 저택을 구입함으로써 로마 사람들을 분노케 했다. 중세에 로마 카톨릭은 많은 도시와 땅을 소유했고, 교회 에 강제적으로 세금을 납부하게 함으로써 엄청난 부를 축적했다. 카톨 릭이 이에 만족하지 않고 연옥의 고통을 면하게 해준다는 면죄부를 팔 기 시작했다.

중세에 면죄부를 파는 사람들은 이곳 저곳을 여행하며 자신의 육 적 쾌락을 위해 죄를 용서하는 문서를 팔았다. 마틴 루터 당시에는 성 베드로 성당을 건축했기 때문에 교황은 돈을 모으기 위해 더욱 면죄부 판매에 열중했다. 면죄부를 파는 사람은 도시를 방문해 교황의 공식 인가서와 교황의 깃발을 내걸면, 모든 계층의 사람들이 면죄부를 사기 위해 줄을 섰고, 긁어모은 돈은 큰 쇠금고에 넣어졌다. 돈궤에는 다음 과 같은 말이 쓰여 있었다. “돈이 상자 속에서 소리를 내며 떨어지는 순 간 고통 당하는 영혼은 연옥에서 구원 받습니다”. 부자들은 별 무리가 없었지만, 가난한 사람들은 조상과 자신의 죄를 용서받기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해야 했다.

이에 루터는 면죄부를 비롯한 카톨릭의 모순을 지적한 95개 조항 을 캐슬 교회 문에 못 박았다. 카톨릭 신학 박사이자 교수였던 루터는 면죄부와 면제부를 파는 행위를 다음과 같이 강력히 비판했다.

“면죄부는 경건한 사기다. 면죄부는 하나님의 공의 앞에 아무 효력을 주지 못한다.”
면죄부가 엉터리라는 가장 큰 증거는 천국과 지옥의 중간이라는 연옥이라는 영계 자체가 없다는 점이다. 그런데도 카톨릭은 아직까지 도 돈을 받고 죽은 자를 위해 기도해 주고 있다.

크리스천언론인협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