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단하나님의교회

하나님의교회 연혁과 안상홍, 장길자

하나님의 교회는 제칠일안식교의 신자 안상홍이 계시를 받고 분리해 창설한 교단이다. 교세는 신도수 약40만 명이다(자체주장 2백만). 이들은 교주 안상홍이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온 하나님이며 성경에 예언된 재림주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이들은 기도할 때도 예수님이 아닌 안상홍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있다.

1. 하나님의 교회 연혁

하나님의 교회(세계복음선교협회)를 세운 안상홍은 1918년 1월 13일 전북 장수군 개남면에서 출생했다. 1937년에 일본에 건너갔다가 1946년 10월에 귀국했다. 1947년 7월에 제칠일 안식일예수재림교회에 입교하고 1948년 12월 16일 인천 낙섬에서 이명덕 목사에게 침례를 받았다.

1953년부터 계시를 받기 시작했다고 하는 안상홍은 1956년에 “10년 안에 예수 재림이 있을 것”이라는 안식교 목사의 설교에 반박하는 간증문을 통해 “초대교회의 진리가 자신을 통해서 회복될 것임을 지시받았다”고 주장했다. 1962년 3월 17일 안식교에서 출교당한 후 그를 추종하는 23명의 소위 ‘시기파’ 신자들과 함께 안식교를 탈퇴하고 1964년 4월 28일 ‘여호와의 전의 산들의 꼭대기’(미가 4장 1-2절)라는 부산에서 하나님의 교회 예수증인회를 창립하고 교회를 설립해 나갔다.

1981년 안상홍은 장길자를 하나님의 신부로 택하고 신도들에게 “어머니 하나님”으로 칭송하게 했다. 안상홍은 37년간 사역을 하다가 1985년 2월 25일 67세의 나이로 죽었다고 한다. 하나님의 교회 홈페이지의 교회 연혁에는 안상홍이 ‘1985년 2월 승천’이라고 명시하고 있다. 그러나 부산 석계공원묘지에 있는 안상홍의 묘비에는 ‘선지 엘리야 안상홍의 묘’라고 쓰여 있다.

안상홍 사후 그의 추종자들은 1985년 3월 22일 본부를 부산에서 서울 관악구 봉천동으로 옮겼고 6월 2일에는 임시총회를 열어 교회 명칭을 ‘하나님의 교회 안상홍증인회’로 개칭하고 안상홍의 이름으로 기도하도록 하고 안상홍의 아내였던 장길자 전도사(1943년 10월 29일생)를 하나님의 신부로 공포하였다. 이후부터 장길자를 신격화하여 ‘어린양의 신부’, ‘하늘에서 내려온 새 예루살렘’, ‘위에 있는 어머니’ 등으로 주장한다.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과 아·태장애인경기대회에 연인원 3만 8000명, 2003년 대구 유니버시아드대회에 연인원 87,000명이 각각 서포터스 활동에 참가, 대통령 표창과 훈장을 받기도 했다.

1985년 안상홍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만 해도 소속 교회 10여개로 미미하던 교세는 당시 약관의 나이(20대)로 총회장을 맡은 김주철 목사가 공격적인 선교에 나서면서 비약적인 성장을 거듭했다. 하나님의 교회 측은 “2009년 1월 현재 등록 신도가 110만 명(국내외 전체), 한국에 400여 개, 해외에 1000여 개의 교회가 설립돼 있으며, 세계 150여개 국가에 선교사가 파송돼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실제 교세는 10만 명 내외로 추산되므로 이 역시 과정이거나 허위일 가능성이 높다.

하나님의 교회는 공식 홈페이지에서 “2000년 전 언약의 피로 세우신 하나님의 교회, 새 예루살렘 어머니 하나님을 믿는 하나님의 교회, 예루살렘 어머니의 사랑을 실천하는 하나님의 교회, 엘로힘 하나님의 영광을 전하는 하나님의 교회”라고 자신들을 지칭한다.

총회장 김주철은 “이 시대는 성령시대로, 성령시대의 구원자는 성령하나님이신 안상홍님과 성령의 신부이신 예루살렘의 어머니이시십니다”고 주장하며 “육체 옷을 입으시고 오신 하나님을 세상이 알지 못합니다. 비방하는 자들에게는 계속 비방거리만 눈에 보입니다”고 한다. 또 “세상 사람들은 믿지 못하여 걸리고 넘어질지라도 시온의 자녀들만큼은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애틋한 사연을 안고 이 땅까지 오신 하늘 아버지 어머니를 올바르게 깨닫고 영접해야겠습니다”고 주장한다.

2. 안상홍과 장길자는 누구인가

① 안 상 홍

그는 1918년 1월 13일 전북 장수군 계남면 명덕리에서 태어났다. 부친의 고향은 경남 함안이었다. 어린 시절을 부산시 해운대구 우일1동 808번지에서 살았으며 1937년 일본에 건너갔다가 1946년 10월 귀국하고 1947년 7월 안식교에 입교하여 1948년(당30세) 12월 16일 인천 낙섬에서 안식교 이명덕 목사로부터 침례를 받았다.

1953년 진리를 깨닫고 재림 시기를 주장하는 ‘시기파’운동에 참가했다가 안식교에서 1962년 3월 17일 출교 당한 후 3월 24일 23명의 안식교 교인과 함께 탈퇴하여 1964년 4월 28일 부산에서 <하나님의 교회 예수증인회>를 창설했다. 이후 1985년 2월 25일 병원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1985년 3월 22일 본부를 부산에서 서울로 옮기고 동년 6월 2일 <하나님의 교회 안상홍증인회>로 개칭했다.

현 조직은 1985년 10월 동대문구 답십리 5동 498-7번지에 총회본부를 두고 있다가 현재의 관악구 봉천동으로 이전했다가 분당에 자리 잡고 있다.

안상홍은 늘 흰옷을 즐겨 입는 모습으로 해운대 빈민가 쓰러져가는 오막살이에서 사는 것을 고집 했다고 한다. 안상홍은 계14:1절의 “어린양이 시온산에 섰고”라는 구절에서 어린양은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온 멜기세덱인데 그가 바로 유월절을 발견한 자신이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이들은 안상홍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안상홍의 이름으로 침례를 베푼다.

② 장 길 자

안상홍씨의 부인은 본래 황원순씨(1923년생)인데 소위 첫째 영적부인은 엄수인(1941년생)씨 였다고 전한다. 엄수인씨는 안상홍과 관계 되기 전에 전 남편과 이혼 하였고, 1978년에 안상홍은 그리스도라 주장한 장본인이다.

장길자 여인(1985년 당시 43세)은 안상홍에 의해 1981년 하나님의 신부로 택함을 받고 세움을 받았다고 전한다. 예수에게도 신부가 있어야 하는데 안상홍이 장여인을 하나님의 신부로 택하여 세웠으니 초림 예수 때 해결되지 못했던 갈비뼈의 문제를 해결 했다는 것이다. 안상홍이 장여인을 신부로 택하는 데도 계시에 의한 선택이었다고 한다. ‘1981년 안상홍은 야생마가 들판에서 마음대로 뛰어 다니는 꿈을 꾸었다. 길길이 뛰던 말이 안상홍의 앞에 끌려와 그가 등을 두드리자 조용히 순종했고 식사 하는데 까지 따라 들어와 밥을 같이 먹고 식사가 끝나자 다소곳이 앉았더니 야생마는 장여인으로 변했다’고 한다. (『한국의 신흥종교 Ⅳ』, p.335-345.)

그런데 장여인은 본래 김재훈씨(1944(?)년생)와 1966년 결혼하여 두 자녀를 둔 어머니였다. 그런데도 장여인을 영적 부인이라 하여 결혼사진까지 찍어서 돌렸다고 한다. 안상홍의 본 부인이 소장하고 있다는 엘리야 복음 선교원의 홍보전단에 새겨진 장여인의 전남편 김재훈씨(충남 청양군 비봉면 양사리 여솔)의 간증문에 따르면, 그는 1966년 장길자 여인과 결혼하여 살던 중 부산에서 노장로라는 분으로부터 전도를 받아 하나님의 교회(증인회)에 나가게 되었다고 한다. 이때부터 장여인은 사도시대의 신앙을 회복하고, 유월절로부터 7개 절기를 지키며 열심을 내더니 어느 날 전도사가 되었다고 하더라는 것이다. 그러던 중 장여인의 전남편 김재훈씨가 해외 취업을 갔다가 돌아와 보니 아내의 마음은 옛날과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고 해외에서 피땀 흘려 벌어서 장만한 집도 일방적으로 처분해서 교주에게 바쳤으며 교주의 말이라면 맹종을 하더니 급기야는 이혼을 요구해 왔다고 한다.

이에 할 수 없이 이혼에 동의한 김재훈씨는 이로 인해 간경화증과 여러 가지 합병증으로 쓸쓸한 하숙집에서 여러 차례 사경을 헤매면서 자식들을 찾아가 “너희들이 가는 길이 잘못된 길이다”고 권면했으나 자식들은 “어머니는 교인들에게 ‘아버지가 죽었다’고 이야기했기 때문에 아버지가 찾아오시면 우리 입장이 곤란하다며 꺼려했다고 한다. 현재 김재훈 씨는 엘리야 복음 선교원에 들어가 집단생활을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안상홍이 죽은 후 안상홍증인회는 영적인 부인을 하나님의 부인으로 섬기는 파(하나님의교회 세계복음선교협회)와 몇몇 분열파가 있다고 알려져 있다. 엄수인씨는 탈퇴하여 <새예루살렘교회>라는 교회를 세웠다고 전해지고, 본부인 황원순씨는 <하나님의 교회>라는 예배처소에서 몇몇이 모여 토요일 예배를 드리고 있다고 알려졌으나 운명한 것으로 확인됐으며, 창립에 동참했던 김순자씨는 따로 부산 수영에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