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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리의 포로 vs 교리의 노예

장발장은 법의 포로였고 자베르는 법의 노예였다. 빅토르 위고의 소설 레 미제라블의 등장인물 중에 장발장을 쫏다가 마지막으로 자살한 사람이 자베르(프랑스어:Javert)라는 사람이다. 1832년 6월 봉기 이후 파리의 센 강을 건너는 다리에서 투신 자살했다. 자베르는 체포해야 할 장발장을 눈앞에서 놓치면서, 아니 그를 놓아주면서 죽음을 택한다. 그의 법은 자신을 죽음에서 구해준 장발장의 사랑 앞에서 굴복한 것이다. 장발쟝은 자베르의 목숨까지도 살려주는 사랑을 추구했지만 자베르는 끝까지 법을 추구했다. 그러다 보니 사랑과 용서가 없는 법의 노예가 되어 버린 것이다.

▲ 법의 포로와 법의 노예(장발쟝 vs. 자베르)
▲ 법의 포로와 법의 노예(장발쟝 vs. 자베르)

자베르는 죽어가면서 “장발장은 법의 포로였고 나는 법의 노예였다”고 말했다. 장발장은 빵하나를 훔친죄로 법의 포로자가 되었고 자베르는 경찰로서 법을 집행하기 위하여 장발장을 쫏았지만 어느듯 법의 노예가 되고 말았다. 사랑이 법을 극복한 것이다.

자베르는 그동안 법과 정의의 사도로 살아왔지만 어느듯 용서와 사랑을 모르는 법의 집행자로서 살다보니 법의 노예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법 이면에 있는 법의 용서와 사랑의 정신이 없었다.

율법의 포로와 율법의 노예(예수 vs, 바리새인)

예수는 율법의 포로였고 바리새인은 율법의 노예였다. 예수는 생명을 중시했고 바리새인들은 형식적 법을 중시했다. 즉 형식적 법치주의에 머물게 된 것이다. 형식적 법치주의에 머물다 보니 법의 이면을 중시하는 예수는 율법의 포로가 될 수 밖에 없었다. 바리새인들이 그에게 씌운 죄명은 안식일에 일을 하여 율법을 준수하지 않은 율법위반죄 이며,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 신성모독죄였다.

그러나 예수는 법의 해석보다 생명을 중시했다. 사람을 살리는 것이 율법의 진정한 정신이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안식일에 상관없이 사람이 병들면 고치는 것이 진정한 법이라고 판단했다. 죽은 문자로 구성된 계명보다 생명이 우선이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생명보다는 죽은 문자로 구성된 율법과 교리에 관심있었다. 생명에 관심있는 사람은 사람을 살리고, 문자와 교리에 관심있는 사람은 사람을 죽였다. 예수는 율법의 해석보다 사람의 생명에 집중했다. 율법을 완성하러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예수를 율법의 포로로 잡기 위하여 율법의 그물을 던졌다. 그들은 예수를 율법의 그물로 잡은 줄 알았지만 어느듯 그들은 율법의 노예가 되었던 것이다. 예수는 죽어서 율법의 그물을 빠져 나갈수 있었다. 바울은 죄가 계명을 틈타서 역사했다고 말할정도로 율법은 이미 죄악에 물들어 있었던 것이다.

바울은 로마서 2:23절에서 “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고 했다. 그들은 율법의 노예가 되어 오히려 자신들이 율법을 범해 하나님을 욕되게 하고 있었던 것이다. 잘못된 율법의 해석으로 생명을 구원한 예수를 율법의 포로로 만들었던 것이다.

교리의 포로와 교리의 노예

한국교회는 이단감별사들에게 속아 생명보다 교리를 선택했다. 한 명의 앉은뱅이도 고치지 못한 자들이 생명보다 교리를 선택하여 교리가 약간 차이가 난다고 해서 병든 자를 고치고 은사활동을 하는 사람들을 이단으로 몬 것은 이단감별사와 이를 묵인한 한국교회가 교리의 노예가 되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한국교회는 참신예찬을 한 것이 아니라 우신예찬을 한 것이다.

특별사면위, 교리의 노예가 아니라 교리의 주인되어, 교리포로자들 해방시켜야

이제 한국교회는 더이상 이단감별사들에 속아 교리의 노예가 되어 다른 사람들을 교리의 포로로 삼지 말고, 장발장과 예수와 같은 법과 율법, 교리의 희생자가 나오지 않도록 해야 한다.

지난 30년 동안 한국교회는 이단감별사들에 속아 교리의 노예가 되어 소명기회도 주지않고 수많은 사람들을 교리의 포로로 삼아서 이단정죄하여 영적 사형을 가했던 것이다. 이제 한국교회는 교리의 노예가 되지말고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교리의 주인이 되어 용서와 사랑, 화해, 사면을 중시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특별사면위가 특별자베르나 특별바리새인이 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그러는 의미에서 예장통합 특별 사면위는 더는 교리에 집착하는 교리의 노예상태에 머물지 말고 교리의 주인이 되어 교리이면의 사랑과 용서, 화해의 정신으로 억울하게 이단교리의 포로가 된 사람들을 하나씩 풀어주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진정한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