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천의무봉 (天衣無縫)

33. 변화산상의 초막

본문 말씀 : 마태복음 17장 4절

베드로가 예수께 여짜와 가로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주께서 만일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기 직전 감람산에 올라가셨을 때에 있었던 기적과 표적의 역사 속에 나타나 있는 제자들의 신앙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라고 말씀을 하셨는데(마7:21), 3년 동안 예수님을 따라 다니고, 예수님과 함께 동행하고, 같이 먹고 마시면서도 제자들은 예수님의 뜻을 알지 못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를 다니는 것과 믿는 것은 다릅니다. 교회 10년, 20년 다녀도 하나님의 뜻을 모른다면 그건 믿는 자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천국에 갈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믿는 자는 하나님의 뜻을 알아 실행하게 될 때에 구원이 보증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통해서 나의 신앙에 어떠한 부분이 부족한지, 내가 무엇을 믿지 못하였는지, 나는 어떠한 자인지를 바로 깨달아서 부족한 부분을 채워 하나님의 온전한 사람으로(고후7:1) 나날이 성장되기를 원합니다.
본문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 1절부터 보도록 하겠습니다.

마17:1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감람산은 800m밖에 되지 않는 산입니다. 관악산보다도 낮습니다. 걸어가 보니 언덕에 불과한 아주 낮은 산이며 높은 산이 아닌데 왜“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라고 하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계21:9 일곱 대접을 가지고 마지막 일곱 재앙을 담은 일곱 천사 중 하나가 나아와서 내게 말하여 가로되 이리 오라 내가 신부 곧 어린양의 아내를 네게 보이리라 하고

신부 곧 어린양 예수님의 아내를 보여준다는 것은 참으로 대단한 일입니다. 어린양의 아내가 어떻게 생겼는지 우리가 어떻게 볼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계21:10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이니

성령으로 이끌림을 받았을 때에 올라간 그 산은 비록 산이 얕고, 낮은 곳이라 할지라도 높은 산이 되겠지만, 성령의 인도함을 받지 못한 자들은 비록 에베레스트산 꼭대기에 올라갔다고 할지라도 높은 산이 아닌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감람산에 올라가신 것은 비록 낮은 산이었지만 크고 높은 산이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성령에 이끌려서 갔기 때문입니다.

어린양의 아내를 보여준다고 하고서 어린양의 아내를 어떻게 봤는가 하는 문제는 다음에 증거 하도록 하고 오늘은 높은 산에 관해서 잠깐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참으로 높은 산은 마지막 때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그 산, 그 조직체, 가장 높은 성령으로 이끌림을 받은 하나님의 성도들이 있는 그 산이야 말로 참으로 높고 큰 산이 되는 줄로 믿습니다.

미4:1 말일에 이르러는 여호와의 전의 산이 산들의 꼭대기에 굳게 서며 작은 산들 위에 뛰어나고 민족들이 그리로 몰려갈 것이라

말일에 이르러서 하나님 성전의 산, 전의 산이라는 것은 실상의 산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성전을 산으로 비유한 것입니다.

구약시대에도 오늘날 이 시대에서도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곳이나 기도처는 전부가 산이었습니다. 모든 종교는 산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불교나 유교나 심지어는 도교까지도 산에서 기도하고 시작이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도 감람산에 올라가셨는데 그 감람산은 갈릴리가 넓게 보이는 큰 언덕 동산과 같이 푸른 잔디가 있는 초장의 산이었습니다. 말일에 하나님의 성전이 세워질 산, 여호와의 전이 세워질 산, 이 산이 작은 산들 위에 뛰어나다고 했습니다. 작은 산들 위에 뛰어나다고 하는 것은 모든 종파 위에 뛰어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산이라는 것은 종교단체를 의미합니다.

겔6:1~3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인자야 너는 이스라엘 산을 향하여 그들에게 예언하여 이르기를 이스라엘 산들아 주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주 여호와께서 산과 작은 산과 시내와 골짜기를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나 곧 내가 칼로 너희에게 임하게 하여 너희 산당을 멸하리니

산이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듣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산은 하나님의 말씀이 증거되는 곳입니다. 사람이 많이 모인 것을 인산인해(人山人海)라고 합니다. 사람의 산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한 것은 성령의 끌림을 받은 산에 올라가셨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성령에 끌림을 받는 산이 된다면 가장 높은 산이 될 줄로 믿습니다.

높은 산은 성령이 동행하심으로써 하나님이 함께한 산이 가장 높은 산입니다. 사단도 사단의 대장이 함께한 그 산은 하나님이 함께한 작은 산보다도 더 높은 산이 될 수도 있습니다.

렘51:25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온 세계를 멸한 멸망의 산아 보라 나는 네 대적이라 나의 손을 네 위에 펴서 너를 바위에서 굴리고 너로 불탄 산이 되게 할 것이니

산이 어떻게 온 세계를 멸망시킬 수가 있겠습니까?
“온 세계를 멸한 멸망의 산아”이런 말씀을 보니 종교단체를 의미하고 있는 줄로 믿습니다. 예언의 말씀으로 기록된 모든 산들은 종교단체를 비유한 말씀입니다.

마17:2 저희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예수님의 얼굴이 해같이 빛나고 변형(變形)되었다고 했는데 변형이라는 것은 얼굴의 형태가 변하여 바뀌어졌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얼굴형 중에서 사각형이 있는데 이런 사람은 대부분 성격이 과격한 사람이 많습니다.

또 달걀형의 예쁜 얼굴이 있고, 삼각형의 못난 얼굴도 있고, 또 뒷머리가 튀어 나와서 곰배같이 못생긴 형이 있지만 그런 형은 박사들이 많고 머리가 좋은 형이 될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성령에 이끌림을 받아서 그 얼굴형이 변해 버렸습니다. 얼굴형이 변하였을 뿐만 아니라 얼굴이 해같이 빛남으로써 예수님의 그 얼굴을 감히 쳐다볼 수가 없었습니다.

빛 속에 감추어진 예수님의 얼굴을 어떻게 볼 수가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부활하신 주님을 막달라 마리아가 찾아갔을 때 주님의 시체 곁에 있었던 막달라 마리아가 3일 전에 만났던 예수님을 보고도 몰라 봤습니다. 그리스도에 대하여 동산지기라고 착각을 하였습니다.

왜 3년 동안 동행한 마리아가 예수님을 몰라 봤을까요?

육체의 예수님과 부활체의 예수님은 그 얼굴이 변형되어 다르기 때문에 제자들도 변형된 예수님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제자들이 부활체의 예수님을 처음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방문 닫아 놓은 가운데 나타난 주님을 제자들은 귀신이 나왔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어이가 없어서 “나는 귀신이 아니다. 귀신은 만져보면 만져지지 아니하되 나를 만져서 창 자국과 못 자국을 보아라.” 하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에 도마가 예수님의 창 자국과 못 자국을 만져 보고 부활 예수님을 시인하였습니다.

이에 주님께서는“나를 보고 믿는 것보다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복 되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20:26~29).

마17: 2 저희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기록된 말씀과 같이 예수님의 얼굴에서 너무 광채가 나니까 그 얼굴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나는 세상의 빛이니(요8:12)”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참 빛으로 오셨기 때문에 그 빛나는 얼굴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여러분도 어두운 저녁때에 라이트를 켠 자동차가 오면 눈이 부셔서 쳐다보지 못합니다. 밝을 때는 볼 수가 있는데 어두울 때는 보기가 힘듭니다.

예수님은 말라기 선지자 이후 사백 년 동안 하나님이 이 땅위에 선지자를 보내지 아니한 흑암의 시대에 빛으로 오셨습니다. 그러나 그 빛보다도 더 밝고 찬란한 빛이 변화산상에서 나타난 예수님의 얼굴이었던 것입니다.

마17: 2 저희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라는 것은 아무리 강력한 검정 옷을 입었다고 할지라도 하늘의 성령을 입은 강력한 사람이 오면 그는 흰 옷 입은 천사인 것입니다.

계7:14 내가 가로되 내 주여 당신이 알리이다 하니 그가 나더러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계19:7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여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 아내가 예비하였으니

구원받은 모든 무리들이 흰 옷 입은 자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늘 군대로써 전쟁하는 자들도 전부 흰 말, 백마 탄 자였습니다.

마17:2 저희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여기에는 변화 산이란 말은 없지만 이 산에서 예수님의 얼굴이 변형되었기 때문에 저는 이 산을 변화 산이라고 보고 싶습니다.“예수를 믿고 예수를 안 뒤 나의 모든 것 다 변했네”라는 찬양의 가사처럼 변화 받은 자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을 믿기 전이나 예수님을 믿은 후나 변화가 없는 자는 죽은 자입니다. 죽은 씨앗을 심어 놓으면 싹이 나지 않고 변화가 없습니다. 살아 있는 생명의 씨앗은 싹이 나고, 잎이 나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으며 변합니다. 이 놀라운 변화가 어찌 예수님께만 있겠습니까?

1년 내내 아무 변화가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교회에 전도 열매를 맺는 변화가 없으면 가정에 변화도 없고, 믿음에 변화도 없으니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는 성령의 귀라도 달고 붙여야지 아무 변화가 없는 자는 죽은 자인 것입니다. 살아 있는 생명체는 변하게 되어 있습니다.

마17:2 저희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육신의 예수님이 완전히 영화(靈化)된 예수님으로 나타나신 것입니다. 왜 영화된 예수님으로 나타나셨는가 하면 살아있는 사람이 귀신을 만나서 같이 얘기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변화산상에 누가 나타났는가 하면 천오백 년 전에 죽은 모세가 나타났고 천 년 전에 죽은 엘리야가 나타났습니다.

요17: 3 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로 더불어 말씀하는 것이 저희에게 보이거늘

제자들도 변화산상에 가면 같이 변하게 되어 있습니다.

옆에 같은 종자의 꽃이 피면 그 옆에 있는 꽃도 피는 것입니다. 또 그늘 밑에 있는 것은 조금 추워서 꽃봉오리만 있고 덜 피었는지 모르지만 며칠 있으면 같이 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영안이 열려서“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로 더불어 말씀하시는 것이 저희에게 보이거늘”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천오백 년 전의 사람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보지도 않고, 이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을 잘 믿는 것도 아니고, 예수님 십자가 지실 때에 다 도망갔던 녀석들이 그런 믿음 가지고 어떻게 예수님의 참 제자가 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옆집에 악한 사람이 살고, 앞집에 선한 사람이 살면 그 앞집에 있는 진한 꽃나무의 향이 바람이 불면 담을 넘어서 악한 자의 집에도 그 향이 들어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멀리 떨어져 있는 착한 자의 집에도 들어가는지를 보면 그 멀리 떨어져 있는 착한 자의 집에는 향기로운 그 향이 조금은 들어가고 악한 자의 집은 가까이 있으니까 많이 들어갑니다. 깨닫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내 마음이 비록 악하고 하나님의 뜻을 모르는 자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의 향기가 진한 곳에 있으면 그 향기를 받아서 변화된 사람이 될 수가 있으며 변화된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진리의 생수를 나누어 줄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마17:3 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로 더불어 말씀하는 것이 저희에게 보이거늘

예수님이 천오백년 전에 죽은 영인(靈人)과 천 년 전에 죽은 영인을 어떻게 만납니까? 그런데 수천 년 전에 죽은 “영인(靈人)”을 만나는 것을 옆 사람이 알 수가 있습니다.

오늘날 귀신 들리고 신들린 여자들은 말하기를 예수님을 만났다고 하는데 그것을 누가 본 사람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본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자기 혼자 만났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보게 되면 예수님의 제자들이 봤습니다.

오늘날 이 시대에는 영인들을 만나기 위해서 산에다 초막을 짓고 있는 무속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영화된 사람으로 변화되었을 때에 구약시대에 이미 영인이 된 모세와 엘리야를 만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똑똑하고 잘난 사람에게 바보같은 비서가 있습니다. 그 비서가 가방을 들고 다니면서 그 똑똑하고 잘난 사람이 다른 똑똑한 사람을 만날 때에 이 비서도 같이 만나게 되어 있습니다. 바보같은 비서가 똑똑하고 잘난 사람이 똑똑하고 잘난 말을 할 때 그 말을 자주 들으면 바보같은 비서도 그 말을 써먹을 때가 있는 것입니다.

마17:3 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로 더불어 말씀하는 것이 저희에게 보이거늘

변화산상의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과 무슨 말을 했는지 이천년 기독교사에 설교한 자가 한 사람도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성경에 적혀 있지 않으니 알 수 있는 재주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한 사람도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성경을 자세히 보면 구약시대에 이미 영인이 된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과 무슨 대화를 하였는지 알 수가 있는 영안이 열리고 영적인 귀가 열리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만약 영안이 열린다면 여러분이 영인의 세계에 가까이 갈 수 있는 것입니다.

눅9:28~31 이 말씀을 하신 후 팔 일쯤 되어 예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시고 기도하시러 산에 올라가사 기도하실 때에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나더라 문득 두 사람이 예수와 함께 말하니 이는 모세와 엘리야라 영광 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씀할쌔

기록된 말씀에서 이 별세(別世)라는 것은 세상을 이별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모세와 엘리야는 예수님의 별세에 대하여 의논하려고 예수님으로부터 초청 받은 것인 줄로 믿습니다.

모세와 엘리야는 예수님이 겪어야할 일을 선험(先驗)한 자들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서 운명하는 그 운명에 관해서 모세와 엘리야와 대화를 나누었던 것입니다.

천오백 년 전 모세와 천 년 전의 엘리야와 어떤 대화를 나누었겠으며 구약시대에 기라성 같이 많은 선지자들이 있었는데 왜 하필이면 모세와 엘리야를 초청하였는가 하는 것입니다. 노아라든지, 아브라함이라든지, 다윗이라든지 얼마나 위대한 선지자가 많이 있었는데 왜 하필이면 모세와 엘리야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 두 사람은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 재림에 관하여 선험(先驗)한 자 즉 먼저 경험한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모세에 관해서 본다면 모세가 출애굽해서 가나안 땅을 문 앞에 둔 모압 땅에 와서 죽었을 때에 모세의 눈은 흐려지지 않고, 그 기력이 쇠하지 않은 건강한 사람이었습니다(신34:7).

60만 명이 보는 가운데 그가 장사되었으나 그의 시체를 아는 자가 없었습니다(신34:6). 시신이 없어졌다는 것입니다. 그 시신이 없어지니까 그 시신을 서로 가져가겠다고 천사와 마귀가 다투는 장면이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유1:9).

그렇다면 예수님과 모세는 무슨 말을 하고 엘리야는 무슨 말을 했는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의 운명에 관해서 얼마나 안타깝게 생각했는가 하면 십자가 지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아버지여,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면케 하여 주시옵소서”라고 먼저 기도를 했고(마26:39) 그 뒤에 가서“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런 말씀을 통해서 본다면 육신적으로 볼 때에 예수님은 십자가 지기를 원치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결정적인 말씀을 하신 것이 있는데 예수님은 이 세상을 떠나는 것이 어쩔 수 없이 정하여진 하나님의 뜻이지만 육신적으로 생각할 때는 떠나기가 싫으셨던 것 같습니다. 그 절실한 내용이 어떻게 기록되어 있는지 보시겠습니다.

마16:26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온 세상보다도 사람의 목숨 하나가 더 귀하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우선 하나님 앞에 감사해야 될 것은 한 사람이 이 땅 위에 태어나자면 정자 2억 개 중에서 하나만 살아남아서 인간으로 태어납니다.

2억:1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대단하지 않습니까? 우리나라 인구가 남북한 다 해봐야 8천만 명밖에 되지 않는데 그 8천만 명 중에 하나로 태어나기도 힘든 것입니다.

여러분은 2억:1이니까 정말로 귀한 분입니다. 똑같은 것이 많이 있으면 값어치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이 지구상에 한 사람 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귀합니까?

예수님의 말씀대로 온 천하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귀한 생명인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아침에 자고 일어났을 때 살아 있다는 것을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침마다 뉴스를 보면 어제 뉴스에 물에 빠져 죽은 사람이 나왔으면 오늘은 물에 빠져 죽은 사람이 없어야 될 것 아닙니까? 애들을 데리고 장난치다 산골짜기에서 물에 빠져 죽고, 그 다음엔 바닷가에서 빠져 죽은 아이가 나오고, 또 그 다음날엔 개울가에서 빠져 죽은 사람이 나옵니다.

어제 교통사고로 사람이 죽었으면 그런 일을 보고 조심해서 다음날에는 교통사고로 죽지 않아야 되는데 교통사고로 죽은 사람이 매일 나오고 또 나옵니다.

예수님도 인간의 한 생명이 얼마나 소중하다는 것을 아시고 우리 인간의 생명을 구원하기 위하여 자기를 희생하며 십자가를 지셔서 우리의 구세주가 되셨다는 것을 깨닫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이 운명하실 때에“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27:46) 라는 기도를 하셨습니다.

이로 보건대 예수님이 자신의 십자가를 즐거이 지고 가신 것이 아니요 만민의 죄를 위하여 희생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별세에 대하여 모세와 대화를 한 것인데 모세가 이렇게 말하지 않았나 생각을 합니다.“나는 모압 땅에서 죽었지만 내 시체가 없어지지 않았느냐. 이와 같이 당신의 시체는 없어진다. 승화(昇華)된다. 그러므로 세상 사람과 다르고 당신은 하나님에 의해서 이 땅위에 태어나신 하나님의 아들이지 않느냐. 걱정 말고 십자가를 지라”

신18:15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중 네 형제 중에서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너를 위하여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를 들을찌니라

모세 같은 선지자 하나를 세우리라 했는데 그 모세 같은 선지자로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행3:20~22 또 주께서 너희를 위하여 예정하신 그리스도 곧 예수를 보내시리니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거룩한 선지자의 입을 의탁하여 말씀하신 바 만유를 회복하실 때까지는 하늘이 마땅히 그를 받아 두리라 모세가 말하되 주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너희 형제 가운데서 나 같은 선지자 하나를 세울 것이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그 모든 말씀을 들을 것이라

선지자의 이름을 들어가면서 당신이 나 같은 선지자라 말하지 않았나 생각을 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선지자가 있었지만 별세(別世)를 앞둔 예수님께서는 누구보다도 모세가 필요로 하였던 줄로 믿습니다.

그럼 천 년 전에 엘리야는 왜 왔는가 하는 것입니다.

엘리야는 어떤 사람입니까? 엘리야는 디셉 사람으로서 구약에 있던 모든 선지자는 최소한 5대 족보가 다 있는데 엘리야는 그저 아비가 누군지 어미가 누군지 마치 멜기세덱과 같이 족보가 없는 선지자였습니다.

그런 엘리야 선지자도 모세 못지않은 큰 기사이적을 행했습니다. 그리고 어떤 선지자도 축복받지 못한 회리바람을 타고 하늘로 승천하셨습니다. 하늘로 승천한 엘리야는 이 땅위에 다시 올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말4:5~6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그가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비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

이로써 예수님의 별세를 앞둔 엘리야는 이렇게 말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내가 누굽니까, 하늘로 승천한 사람 아닙니까. 말라기 선지자가 뭐라고 말했습니까. 엘리야가 다시 오리라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당신은 나와 같이 하늘로 승천할 것입니다. 그리고 엘리야와 같이 재림할 것입니다.”

승천과 재림을 엘리야가 자기 몸으로, 실상으로 예수님의 별세에 관해서 보여주신 것이라고 저는 생각을 합니다.

이런 입장에서 본다면 구약시대 어떤 선지자보다도 모세와 엘리야는 예수님의 죽음에 관해서 확신을 주고, 담대함을 주고, 승리할 수 있는 용기를 주신 분인 줄로 믿습니다.

그러기에 모세와 엘리야가 변화산상에 나타났고, 또 예수님은 성령의 이끌림을 받아서 이미 죽은 영인(靈人)들을 만나기 위하여 그 얼굴이 영화 되었고 변화되어서 살아 있는 사람이 수천 년 전에 죽은 영인들을 만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이 마지막 때에 육신이 살아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계11:15) 홀연 변화를 받아서(고전 15:51~54) 영인들과 같이 영생의 몸이 되었을 때에 구약의 선지자들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오늘 현재의 사람이 이런 육체를 가지고는 선지자들을 만날 수도 없고 만나지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때 하나님의 백성들은 예수님과 같이 변화를 받게 되어 있습니다.

빌3:21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

기록된 말씀과 같이 예수님을 믿는 자들이 그리스도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홀연 변화를 받을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과 같이 변케 하시니까 예수님이 영인들을 만난 것과 같이 영인들을 만날 수 있으니 여러분이 아브라함을 만날 수도 있고, 노아도 만날 수가 있고, 구약 선지자들을 다 만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런 놀라운 축복의 말씀이 여러분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축복이 될 줄로 믿습니다.

놀라운 것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변화산상에서 모세와 엘리야와 대화하는 것을 보았는데 본문말씀 보시겠습니다.

마17:4 베드로가 예수께 여짜와 가로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주께서 만일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

기록된 말씀에서 베드로가 예수님과 모세와 엘리야를 위하여 초막 셋을 짓겠다고 한 말에 대하여 베드로가 굉장히 믿음이 좋은 것으로 설교하는 분들도 있으나 저는 그렇게 보지를 않습니다. 왜냐하면 초막 셋을 짓겠다고 했는데 이 초막이라는 것은 풀로 만든 움막을 말하는 것입니다. 모세가 출애굽 할 때 있었던 초막입니다.

눅9:33 두 사람이 떠날 때에 베드로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하되 자기의 하는 말을 자기도 알지 못하더라

예수님은 하나님의 성전에 계실 분이지 초막에 계실 분이 아닙니다. 특히 모세와 엘리야도 마찬가지입니다. 왜 초막을 짓겠다고 했겠습니까? 저 같으면 대궐을 짓겠다고 할 것입니다. 이런 소리는 바로 미친 소리입니다. 잠결에 일어난 정신 나간 자의 미친 소리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예수님이 변화 산에서 모세와 엘리야와 대화하고 있을 때에 처음부터 본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제자들은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잠을 자고 있다가 잠결에서 깨어나기도 전에 눈을 떠 보니까 예수님이 모세와 엘리야와 대화를 하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베드로가 주를 위하여 초막 셋을 짓겠다고 말을 해 놓고 자기가 무슨 말을 했는지 자기도 알지 못하였다고 했습니다(눅9:33). 그러니까 미친 소리입니다. 미친 소리 한 것을 참 믿음의 소리인 줄 믿고 믿음이 좋아서 초막 셋을 짓겠다고 말했다고 한다면 그 사람 또한 미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눅9:32~33 베드로와 및 함께 있는 자들이 곤하여 졸다가 아주 깨어 예수의 영광과 및 함께 선 두 사람을 보더니 두 사람이 떠날 때에 베드로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하되 자기의 하는 말을 자기도 알지 못하더라

기록된 말씀과 같이 자기가 한 말을 자기도 모르는 자가 초막을 짓겠다고 하는 것은 거짓말한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바로 누구인가 하면 십자가 지기 전 성령을 받지 못한 상태의 제자들의 정신이, 그 믿음이, 영혼이 깨어 있지 못한 자라는 것을 깨닫기를 원합니다. 그 심성이 깨어 있지 못한 자입니다.

이 말씀에 너무 감격해서 정신을 못 차릴 사람들도 있고 마치 그 영혼이 자다가 깨어난 것 같이 어렴풋한 사람도 있을 것 같습니다.

롬13:11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왔음이니라

자다가 깰 때라는 것은 실상의 자다가 깨는 것을 말한 것이 아닙니다. 영혼이 잠자는 상태에서 깨어난 자들을 말합니다. 때와 시기를 아는 데는 깨달음이 있어야 합니다. 짐승들도 때와 시기를 아는데(렘 8:7) 때와 시기를 알지 못하는 것은 잠자는 자요 그리스도를 바로 아는 자가 아니기 때문에 초막 셋을 짓겠다고 한 것입니다.

시기와 때를 분별한 자는 깨어있는 자입니다. 이 말씀을 잘 깨우침 받기를 원합니다. 마치 베드로처럼, 그와 함께 있는 제자들처럼 초막을 짓겠다고 하는 어리석은 자가 없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초막을 짓겠다고 설교하는 자가 있다면 얼마나 어리석은 자들인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초막에 계실 분이 아니고 하나님의 성전의 보좌에 계신 분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변화산상에 나타난 모세와 엘리야를 보고 겁먹은 것입니다.

막9:6 이는 저희가 심히 무서워하므로 저가 무슨 말을 할는지 알지 못함이더라

기록된 말씀과 같이 모세와 엘리야를 본 제자들이 무서워함으로써 모세와 엘리야가 무슨 말을 하는지 두렵고 떨리다 보니까 바로 알지 못하고 엉겁결에 초막 셋을 짓겠다고 한 것입니다.
이런 말씀을 볼 때에 예수님의 제자들은 영안이 열리지 못한 자들입니다.

마17:6 제자들이 듣고 엎드리어 심히 두려워하니

예수님의 제자들이 얼마나 두려워하였으면 예수님이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였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모세와 엘리야의 영인을 보고 엄청나게 두려워했던 것입니다.“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두려움이 없으리로다(시23:1~4)” 하는 자들이 다 되기를 원합니다.

그러므로 자기들이 하는 말을 자기들도 알지 못하였다고 하였는데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 하신 이후에 변화 산에 있어서 하나님이 하신 말씀을 나중에 가서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난 뒤에,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난 뒤에 나중에 알게 되었습니다.
베드로의 고백을 보겠습니다.

벧후1:16~1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너희에게 알게 한 것이 공교히 만든 이야기를 좇은 것이 아니요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라 지극히 큰 영광 중에서 이러한 소리가 그에게 나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실 때에 저가 하나님 아버지께 존귀와 영광을 받으셨느니라

이와 같이 베드로는 나중에 가서 깨달았습니다.

흑인들은 밤중에 자다가 이를 하얗게 내놓고“히히”하고 웃는다고 합니다. 왜 웃는지 의학적으로 조사해 보니 머리가 둔해서 낮에 우스운 걸 봤는데 잘 때에 낮에 우스운 일이 생각이 나서 잠자던 중에 이를 하얗게 내놓고 자다가 웃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흑인들은 그나마 다행입니다. 낮에 우스운걸 보고 밤에 생각나서 웃으니 다행인데 이런 말씀을 듣고도 밤중에 자다가 깨달아서 웃는 것이 아니고, 1년이 되고 2년이 되도 깨닫지 못하다가 어느 한날 3년째 되는 날에 설교를 듣다가 이제 깨달았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보다 훨씬 낫지 않습니까? 여러분은 이 말씀을 통해서 초막에서 주님을 만난 자가 아니라 성령의 깨우침을 받아 거듭난 자로 오늘 이 말씀을 깨우침 받은 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변화산상에서 성령의 이끌림을 받은 그 변화의 역사가 여러분에게 큰 빛으로 나타나실 때에 빌립보서 3장 21절에 있는 말씀처럼 그리스도와 같이 영광의 몸으로 변화를 받은 큰 영생 구원의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예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