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천의무봉 (天衣無縫)

31. 두 언약의 실상

본문말씀 : 갈라디아서 4장 22~31절

기록된 바 아브라함이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계집종에게서 하나는 자유하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나 계집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하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 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가라 이 하가는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 산으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데니 저가 그 자녀들로 더불어 종 노릇 하고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기록된 바 잉태치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구로치 못한 자여 소리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 하였으니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한 것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계집종과 그 아들을 내어쫓으라 계집종의 아들이 자유하는 여자의 아들로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느니라 그런즉 형제들아 우리는 계집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하는 여자의 자녀니라

같은 사람이라도 앞에서 보면 눈도 있고, 코도 있고, 입도 있고, 참 얼굴이 예쁘게 보이는데 뒤에서 보면 얼굴이 보이지 않습니다. 옆에서 보면 볼떼기와 한 쪽 코 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도 어떤 방향에서 보느냐에 따라서 느끼는 감각과 생각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설교 제목을 두 언약이라고 했습니다만 이 말씀을 가지고 종과 아들의 입장에서도 보고 두 언약이라고도 보고 여러가지 편으로 볼 수 있습니다. 어떤 방향으로 보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마음에 오는 영감과 모양이 다른 것입니다.

수박도 마찬가지입니다. 수박을 먹는데 꼭지 달린 부분을 먹는 것과 햇빛을 많이 받은 가운데 부분을 먹는 것과 햇빛을 보지 못한 땅에 닿았던 부분을 먹는 것은 맛이 다릅니다. 생선도 머리 부분과 꼬리 부분, 몸통 부분의 맛이 다릅니다. 꼬리 부분의 고기가 제일 맛이 좋습니다. 참외는 꼭지 부분을 먹으면 아주 씁니다. 그래서 꼭지부분은 약으로도 사용하는데 몸통 부분은 또 답니다.

그래서 오늘은 특별히 두 언약에 관한 부분에 대하여 증거를 하고자 합니다. 사람이 성경을 안다는 것은 신(神)을 안다는 것과 같습니다.

요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성경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을 안다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곧 무엇을 의미하는지 보시겠습니다.

요17: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성경을 아는 것이 영생의 길이 열린 것인 줄로 믿습니다. 원래 언약이라는 것은 말로 한 약속을 언약이라고 합니다.

글로 쓴 약속은 서약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맹서한 약속을 맹약이라고 합니다. 성경은 아브라함의 계집종 하갈과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에 대하여 두 언약이라고 하였습니다(갈4:22~24).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믿을 수 있는 언약은 기록된 말씀과 같이 구약성경의 언약과 신약성경의 언약 두 언약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이 성경을 두 여인으로 비유한 두 언약으로 보자는 것입니다.

구약의 언약과 신약의 언약, 구약의 언약의 속에는 여호와 하나님이 계시고 신약의 언약 속에는 여호와 하나님은 어디로 가셨는지 사라지고 아버지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래서 구약의 언약과 신약의 언약은 엄청난 차이가 있다고 볼 수가 있습니다.

성경을 바로 알아서 성경에 기록된 말씀대로 사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들이 가는 길입니다. 만약에 성경과 다른 길을 살아간다면 교회 다닐 필요도 없고, 신앙 생활할 필요도 없습니다.

요5: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성경은 바로 예수님을 증거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바로 안다는 것은 예수님을 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증거 하면 그 증거를 받는 자는 예수님이 어떤 분인가를 알게 됩니다. 예수님을 알면 영생의 나라로 들어가게 될 줄로 믿습니다. 본문 말씀을 읽으면서 증거 하도록 하겠습니다.

갈4:22 기록된 바 아브라함이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계집종에게서 하나는 자유하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나

기록된 말씀에서 두 아들은 누구인가 하면 하갈에서 나온 이스마엘과 사라에서 나온 이삭입니다. 하갈은 사라의 몸종이며 목욕을 시켜주고, 등과 허리를 긁어주고, 업어주고, 무엇이든지 시키는 대로 다 하는 몸종을 자기 남편에게 바쳐서 끊어진 집안의 대를 잇고자 했습니다. 이로 인하여 몸종 하갈은 아브라함으로부터 이스마엘이라는 아들을 낳았습니다.

아들을 낳고 나서 보니까“이제 내가 이 집에 안주인이 아닌가, 내 여주는 아브라함의 본처지만 자식도 없으니 무슨 힘이 있겠느냐. 내가 이 집에 대를 이를 아들을 낳지 않았는가?” 이렇게 생각을 하고 여주가 된 사라에 대하여 거만하고 교만했습니다.

종이란 것은 우리나라도 그랬습니다만 주인이 종을 죽일 수도 있고 살릴 수도 있습니다. 종은 주인에게 물건과 다름이 없기 때문에 종에서 아들로 풀어줄 수도 있고, 영원히 종노릇 할 수밖에 없도록 평생토록 풀어주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바로 종의 문서를 가진 아들의 권세가 대단한 권세를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입니다. 종은 자유함이 없고 종의 목숨은 주인에게 달려있습니다. 그러므로 종은 주인 앞에서 인격이 없습니다. 이런 시대가 바로 구약시대 곧 종의 시대였습니다. 대표적으로 아브라함의 집안에서 종인 하갈에게서 나온 자가 바로 이스마엘입니다. 그래서 이스마엘과 이삭은 서로 상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삭은 어떤 자인가 하면 아브라함의 나이가 백세가 되고 아내의 나이가 구십 세가 되어 자식을 낳을 수가 없는 석녀(石女)였습니다. 경도가 끊어진지 오래됐기 때문에 아기를 임신할 수 있는 태가 말라 붙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명년 이 때에 네게 아들이 있으리라.”고 말을 했습니다.

인간적으로 볼 때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태가 말라 붙어서 할머니 뱃가죽하고 창자하고 딱 들러 붙었는데 구십 세 노인이 어떻게 아기를 낳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불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불가능할 것을 가능한 것으로 약속을 했습니다. 그 약속은 사실대로 이루어져서 그 다음 해에 아들을 낳게 됩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있어서 약속으로 낳은 그 아들이 바로“이삭”인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이 이같이 말로 약속해서 낳은 아들이 바로 언약의 아들 이삭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종의 아들 이스마엘은 어떻게 낳았는가 하면 하나님의 약속하고는 상관이 없이 인간의 정욕으로 남자 여자가 서로 사랑하고 좋아서 생리적 현상에 의하여 생긴 것이 바로 이스마엘이라는 아들입니다. 하나님과 어떠한 약속도 없이 보통 사람처럼 남녀 관계로써 낳은 아들이므로 하나님의 약속으로 낳은 아들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약속하고는 상관없이 낳은 아들은 하나님의 약속으로 낳은 아들과 족히 비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로써 이스마엘은 육체를 따라 났다고 하였고, 이삭은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고 말씀을 했습니다.

갈4:23 계집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하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한 사람의 남편 아래서 자식이 나왔는데 먼저 난 자식 이스마엘은 육체를 따라 났고 나중에 낳은 자식은 하늘의 약속이 있어서 그 약속에 의해서 자식이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불가능한 것이 하나님의 약속으로 모든 것이 가능하여서 도태된 태가 임신하여 기적으로 낳은 아들이“이삭”이요, 이삭은 그리스도를 상징한 인물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있으면 모든 것이 가능한 줄로 믿습니다.

갈4:24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 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가라

비유란 것은 사실과 비슷한 것을 들어서 비유라 말하는데 사실로 아브라함에게 두 여인들이 있었는데 어째서 이 두 여인들을 비유라고 했는가 하는 것입니다. 두 여인에 관하여는 비유가 아니라 사실로 종에게서 이스마엘이 나왔고 또한 아브라함의 본처인 사라에게서 이삭이 나왔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비유가 되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곧 아브라함의 가정의 사건을 비유로 해서 미래의 것을 예언하고 있는 말씀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사건을 하나님의 두 가지 약속의 언약으로 비유하여 미래에 관해서 예언한 말씀으로 깨닫기를 바랍니다.

갈4:24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 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가라

하가(하갈)는 시내산에서 종을 낳았다고 하였으나 하가(하갈)나 사라는 가나안 땅에서 다 아들을 낳았지 시내산에서 낳은 것은 아닙니다. 하갈은 시내산에서 종을 낳은 것이 아니며 하갈은 아브라함의 집 가나안 땅에서 시내산으로 쫓겨 나갔습니다. 왜 쫓겨나갔는가 하면 하갈이 아들을 낳았다고 종의 여주가 되는 사라에게 너무 큰 소리치고 주인마님 노릇을 하려고 하니 사라가 마음이 너무 상해서 아브라함에게 말하기를“차라리 내가 이 집에서 쫓겨나가던지, 저 종, 하갈이 쫓겨나가던지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시오.”하고 남편 아브라함에게 말을 했더니 남편이 하는 말이“언제는 당신의 종이 아니었느냐? 당신 마음대로 해라.”함으로 사라는 하갈만 쫓아내면 되는데 하갈과 하갈의 아들까지 시내산으로 쫓아내 버렸습니다.

하갈의 아들 이스마엘을 쫓아내서 시내산 밑에서 살게 된 것입니다. 그 족속들이 바로 오늘날 마호매트를 믿고 테러를 일삼는“이슬람”으로서 회교의 주인공들입니다. 바로 이스마엘 족속입니다.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인데 하나님의 성전이 예루살렘에 세워져 있지 않고 회교의 사원 마호매트의 종교가 예루살렘의 성전이 있던 자리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지순례에 가면 황금색으로 지붕을 동그랗게 만들어서 번쩍번쩍 빛나는 그 곳이 회교의 성전입니다. 그 회교도들은 제일 싫어하는 것이 기독교인들입니다. 회교를 믿는 자기의 종족이 기독교를 믿으면 이유 없이 아버지가 아들을, 아들이 아버지를 살해해 버립니다. 참 무서운 악질적인 종교입니다. 구약에 예언되어 있는 메시아가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는데 그들은 마호매트라고 합니다.

하갈로부터 나온 이스마엘의 후예들이 오늘날“이슬람”종교로써 코란경을 성경으로 삼은 아브라함의 종에서 나온 자 이스마엘 족속들입니다.

갈4:24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 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가라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라고 하였습니다. 기록된 말씀의 여자들이란 사라와 하갈을 말합니다. 왜 이 여자들이 두 언약인가 하면 구약의 사라와 하갈을 비유하여 영적인 아브라함 자손이 현재 종으로 난 기독교인들과 이삭과 같이 약속을 받은 아들로 나온 기독교인으로 구분 된 것을 두 언약으로 비유한 것입니다.

갈3:29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기록된 말씀과 같이 그리스도께 속한자면 몽땅 다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하였습니다.

여러분들도 그리스도께 속했기 때문에 영적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입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 그리스도 이후에 어떻게 존재하게 되는가 하면 오늘날 기독교인들 중에서 하갈과 같이 주의 종, 말씀의 종에서 나온 종의 신앙을 가진 자들이 있고, 기독교인들 중에서 영적인 사라로부터 나온 이삭과 같이 약속의 말씀으로 된 하나님의 자녀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인 중에 어떤 자가 하갈에서 나온 이스마엘 족속이고 어떤 자가 하나님의 약속으로 나온 이삭과 같은 자녀인지 깨닫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하갈에서 나온 저주받은 종의 자녀가 될 사람은 이 말씀을 들어도 깨닫지 못한 자가 되고 이 말씀을 잘 들어서 하나님의 아들이 된 이삭과 같은 하나님의 아들 딸이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들로서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 되시기를 원합니다.

여기에서 우선 하갈에서 나온 이스마엘을 육체를 따라 났다고 했습니다(갈 4:23). 교회가 육체적인 교회라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교인이 몇 만명, 우리 교회는 교회가 무슨 건물로 지어졌다. 우리 교회는 대통령이 나오고, 장관이 나오고, 코미디언도 나온다. 우리 교회 목사님은 하버드대학교도 나오고, 서울대도 나오고 대단한 실력이 있다. 하면서 육신적으로 외모로 큰 교회를 자랑하는 이것이 바로 이스마엘과 같이 육체를 따라 나온 자들의 교회입니다. 부흥회의 포스터를 붙이면 자기 사진을 대문짝만하게 붙이고 유명한 사람의 이름을 써 놓으면 사람들이 그걸 보고 갑니다. 이들은 모두가 육체를 따라 난 자들입니다.

성령을 따라 난 자라면 그리스도의 얼굴을 앞세우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전파하고 자랑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갈4:22~23 기록된 바 아브라함이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계집종에게서 하나는 자유하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나 계집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하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이 약속이라는 것은 참 대단한 것입니다. 사람이 약속한 것을 지키지 못하면 사람 대접도 받지 못하는데 하나님이 약속을 했으니 약속한 자녀라면 하나님이 약속한 자녀가 말세에 구원 받은, 택함을 받은, 축복 받은 자녀가 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갈4:24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 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가라

이 여자들을 비유하여 두 언약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두 언약이란 종의 신앙을 가진 자와 아들의 신앙을 가진 자를 비유하여 두 언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갈4:25 이 하가는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 산으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데니 저가 그 자녀들로 더불어 종 노릇 하고

성경을 너무 문자적으로 보고 있는 자들이 많습니다.

마13:34 예수께서 이 모든 것을 무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고 비유가 아니면 아무것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니

비유가 아니면 아무것도 말씀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나오는 지명이라든지 문자라든지 거의가 다 비유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예루살렘이 어디인지 묻는다면 지금 중동 이스라엘에 있는 예루살렘을 예루살렘이라고 하는 자들은 하갈에 속한 자입니다. 그러면 약속으로 나온 자들은 어떤 자들이냐 하면 스가랴 8장 3절에 예루살렘은 진리의 성읍이라고 하였습니다.

갈4:26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위에 있는 예루살렘이 있고 아래 있는 예루살렘이 있는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하갈의 종의 족속은 지금 있는 예루살렘, 아래에 있는, 땅에 있는 예루살렘으로 비유했고,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진리의 성읍(슥8:3) 곧 하늘에 속한 예루살렘으로 비유한 줄로 믿습니다.

그러면 위에 있는 예루살렘과 아래 있는 예루살렘에 관해서 좀 구별을 한다면 하나님이 구약시대에 아브라함에게 언약을 했습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가라고 했는데 그 가나안 땅이 지금의 가나안 땅, 요단강 서해안 지역에 있는 그런 지리적 가나안 땅으로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그곳에는 젖과 꿀이 흐르지 않습니다.

실제로 성지순례를 해 보면 그 가나안 땅이 거의 다 사막지대입니다. 산은 있으나 나무는 없고 전부 들판입니다. 나무 한 그루에 수도꼭지 하나가 붙어 있습니다. 그게 무슨 가나안 복지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겠습니까? 그들이 유목민 생활을 한 것은 제자리에서 농사지을 수 있는 물이 없으므로 살 수가 없어서 이리저리 옮겨 다니는 유목민 생활을 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날 지리적인 가나안 땅을 가나안 땅으로 말하지 않았습니다. 앞으로 이루어질 영적인 가나안 땅, 하나님의 백성들이 잘 살 수 있는 복지의 땅을 비유했습니다. 육신을 좇아 율법의 종이 된 자들은 지리적인 가나안 땅을 찾지만 하나님을 좇아서 언약의 아들이 된 자들은 하늘나라의 가나안 땅을 찾는 줄로 믿습니다.

아브라함의 여종 하갈로부터 나와 육신으로 따라 나온 자는 이스마엘을 낳고 그들은 십계명의 율법을 좇아갔습니다. 그러나 사라는 언약을 따라 나온 자유한 자는 아들 이삭을 낳고 바로 하나님의 유업을 이을 자가 되었습니다.

현재 지명적인 예루살렘을 말하는 자들은 스스로 하갈에서 나온 영적으로 종된 아들입니다. 성경을 찾는 참 하나님의 백성들이 찾는 예루살렘은 어디인지 보시겠습니다.

슥8:3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시온에 돌아왔은즉 예루살렘 가운데 거하리니 예루살렘은 진리의 성읍이라 일컫겠고 만군의 여호와의 산은 성산이라 일컫게 되리라

하나님이 시온에 오셔서 진리의 성읍 예루살렘에 거한다고 하였습니다. 지명적으로 보아도 실상은 예루살렘 성하고 시온하고 너무 가까이 있습니다.

갈4:26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우리의 어머니라고 하였습니다. 어머니라는 것은 우리를 영적으로 낳은 자를 말합니다. 예루살렘을 많은 사람들이 돌로 만든 건축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말씀을 보니 예루살렘은 사람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자유자, 우리의 어머니가 될 사람은 누구인지 보시겠습니다.

갈5:1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그 자유는 죄에서 자유함을 얻게 함인 줄로 믿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으니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했습니다.

우리에게 자유를 주신 그리스도는 야고보서 1장 18절에 보시면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았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종의 멍에를 메고 스스로 주의 종이라고 하는 자들은 하갈 족속입니다. 구약시대는 종의 시대였습니다. 그러므로 종의 신앙을 벗어날 수가 없는 하갈 족속입니다. 신약시대는 아들의 시대였습니다. 구약시대는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많은 군사를 거느리는 하나님이므로 군사정치를 한 것입니다. 야훼의 하나님, 진노의 하나님, 심판의 하나님 그런 무서운 하나님이었습니다.

원래 종의 입장에서 보면 주인이 무섭습니다. 신약시대에 와서는 예수님이 아버지 하나님이라고 불렀습니다. 신약시대 성경 어디를 찾아봐도 여호와 하나님은 없습니다. 아버지 하나님만 계실 뿐입니다.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대단하지 않습니까?

주기도문에도 마태복음 6장 9절에 보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우리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자들은 아들뿐입니다. 종은 아버지라고 할 수 없습니다.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자는 아버지와 아들 관계가 이루어졌어야 합니다. 종은 주기도문 할 때에“하늘에 계신 우리 주인님”이라고 기도하여야 할 것입니다.

신약시대의 하나님은 우리와 가장 가까이 계셨고, 우리의 고초(苦楚)를 지고,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를 지셨던 분이 바로 우리의 참 하나님이요 우리를 낳으신 예수 그리스도인 줄로 믿습니다.

약1:18 그가 그 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좇아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주께서 우리를 낳은 줄로 믿습니다. 예루살렘은 진리의 성읍이라 했고(슥8:3) 진리는 요한복음 17장 17절에“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니이다.”하였으므로 진리의 성읍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성읍을 이룬 장소가 진리의 성읍인 줄로 믿습니다.

곧 그리스도께서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습니다. 우리를 낳으셨으므로 위에 있는 예루살렘의 주인이 바로 우리의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인 줄로 믿습니다.

위에 있는 예루살렘이 예루살렘의 도성(都城=도시의 성읍)이 아닌데 오늘날까지 예루살렘을 실상의 도성인 줄로 알고 있습니다. 아주 아름답고 화려한 도성, 순금으로 꾸미고 황금 길을 거닐고 이런 환상적인 건물을 예루살렘으로 대부분이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자세히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계21:9 일곱 대접을 가지고 마지막 일곱 재앙을 담은 일곱 천사 중 하나가 나아와서 내게 말하여 가로되 이리 오라 내가 신부 곧 어린 양의 아내를 네게 보이리라 하고

어린양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의 아내를 너희에게 보여주겠다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의 아내가 어떻게 생기신 분인지 보겠습니다.

계21:10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이니

성령으로 끌림 받아 갔으니까 육신적으로 간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높은 산에 올라간 것입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사도요한의 영혼이 높은 산으로 올라간 것입니다. 신부를 보여준다 하고서 높은 산에 올라가서 예루살렘을 보여 주었습니다. 정말로 대단합니다. 그러므로 예루살렘의 아름다운 도성은 신부의 아름다움을 환상적인 도시로 보여준 것입니다. 사도요한이 성령을 따라서 높은 산에 올라가서 본 것은 보석성은 아니라는 것을 깨닫기를 원합니다.

계21:1~ 2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하늘에서 내려오는 예루살렘 도성을 신부로 비유했습니다. 신부를 보여준다 하고서 예루살렘을 보여주고 예루살렘을 보고 신부로 비유했습니다. 이런 입장에서 본다면 실상의 도성이 아니라 예루살렘 도성은 신부의 자격을 갖춘 사람들의 도성(都城)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 도성을 사람으로 상징하고 있기 때문에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우리의 어머니라고 했습니다(갈4:26). 어머니라고 하면 바로 여자를 상징한 것입니다.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신 어머니를 상징한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도 예루살렘을 말씀하실 때 도성으로, 건물로 말하지 않았습니다.

마23:37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예루살렘에 사는 하나님의 백성들, 사람들을 가리켜서“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암탉이 병아리를 모으듯 내가 너희를 모으려고 한 적이 몇 번이나 있었더냐”하였던 사실인 것을 깨닫기를 원합니다.

그러므로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우리의 어머니라고 했는데 이것을 실상의 건물로 알고 있으니 이런 한심한 일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므로 스가랴 선지자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예루살렘의 딸이라고 했습니다. 예루살렘(슥8:3)이 우리를 낳았다고 한 것입니다(약1:8).

슥9:9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찌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찌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

하나님의 백성을 예루살렘의 딸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실 것을 스가랴 선지자가 예언하였습니다. 왜 나귀 새끼를 타셨는지 보시겠습니다.

마21:4~5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

예수님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 도성에 입성을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온 예루살렘 성에 많은 사람들이 온통 소동을 한 것입니다.

마21:6~11 제자들이 가서 예수의 명하신 대로 하여 나귀와 나귀 새끼를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으매 예수께서 그 위에 타시니 무리의 대부분은 그 겉옷을 길에 펴며 다른 이는 나무 가지를 베어 길에 펴고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질러 가로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니 온 성이 소동하여 가로되 이는 누구뇨 하거늘 무리가 가로되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 예수라 하니라

세상에 진짜 임금이 와도 이런 일이 없었는데 예수님이 나귀 새끼를 타고 왕이라는 소리를 들으면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니 온 예루살렘 성이 소동했다고 했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나귀 새끼를 타셨다는 것은 큰 의미가 있습니다.

사1:3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셨도다

구유라는 것은 말이나 소가 먹는 밥통입니다. 주인의 구유는 주인의 밥통입니다. 이 사람이 무슨 생활을 하고 무엇을 해서 먹고 사는지 아는 것이 나귀라는 것입니다.

주인의 얼굴을 아는 것하고 무엇을 해서 먹고 사는 것을 알고 밥통을 아는 것은 전혀 다릅니다. 소는 자기 주인이 누구인지 알지만 나귀는 주인만 아는 것이 아니라 주인의 구유까지 아는 줄로 믿습니다.

나귀를 탄 사람이 나귀의 주인입니다. 예수님이 바로 나귀의 주인입니다. 나귀의 주인을 아는 구유, 구유를 아는 나귀, 그래서 참 주님을 모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한 사람을 나귀로 비유한 줄로 믿습니다.

나귀는 참 대단한 영감이 있는 자입니다. 브올의 아들 발람이 하나님의 언약을 어기고 발락에게 찾아갑니다. 이스라엘을 저주하고 재산을 많이 얻고 명예와 권세를 얻으려고 나귀를 타고 하나님을 거역하는 불륜의 길을 갈 때에 나귀가 영안이 열렸습니다.

시퍼런 칼을 들고 서 있는 하늘의 사자를 보고 나귀가 가던 길을 멈춘 것입니다. 이에 발람은 불순한 나귀에게“이놈의 자식 내가 칼이 있었으면 네 목을 베었으리라”하니까 나귀가 있다가“왜 때려”라고 하자 다시 나귀의 얼굴을 쳐다보고 앞을 보니 하늘의 사자가 자기를 죽이려고 칼을 들고 서서 “이놈, 네가 나귀가 아니었다면 네 목이 벌써 날아갔을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나귀는 영감이 있는 짐승입니다. 이런 나귀를 타고 예수님이 예루살렘성에 입성하신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잘 모신 자를 성경에는 나귀로 비유했다는 것을 깨닫기를 원합니다. 나귀를 타야 예루살렘성에 입성할 줄로 믿습니다.

나귀는 큰 말과 비교되는 아주 작은 짐승입니다. 그래서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우리의 어머니라고 하였고(갈4:26) 진리의 성읍이라고 하였습니다(슥8:3) 우리의 참 구원의 역사입니다.

계21:2~3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하나님의 장막이 인간이 있는 데로 내려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늘로 올라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장막이 내려옵니다.

계21:3~4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이 영생의 섭리는 사망이 없는 축복이며 바로 위에 있는 예루살렘으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깨닫기를 바랍니다. 오늘날의 하갈은 바로 종들입니다. 종은 어떤 자가 종인지 보시겠습니다.

요15:15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

주인의 하는 것을 모르는 것이 종입니다. 우리가 예수의 친구가 될 때에 예수님이 하나님께 들은 것을 다 알 수 있게 될 줄로 믿습니다.

갈4:7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이을 자니라

아들이 되어야 합니다. 종말에는 아들의 시대와 종의 시대가 함께 갑니다. 그래서 가라지와 알곡이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라고 하였습니다(마 13:30). 가라지와 알곡을 종과 아들로 비유한 것입니다.
구약은 종의 시대였고, 신약은 아들의 시대입니다. 그러므로 구약은 만군의 여호와 시대였고 신약시대는 아버지 하나님의 시대입니다. 종의 신앙을 가진 자들과 아들의 신앙을 가진 자들이 다 함께 신앙생활 할 때에 종의 신앙을 가진 자들이 아들의 신앙을 가진 자들을 핍박한다고 했습니다.

갈4:28~29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한 것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비록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육체를 따라 난 종이 성령을 따라 난 하나님의 아들을 핍박한다고 하였고 이제도 그러하다고 하였습니다. 명년 이 때에 네게 아들이 있으리라고 한 하나님의 약속으로 따라 난 것과 마찬가지로‘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온 자녀가 약속의 자녀인 줄로 믿습니다.

약1:18 그가 그 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좇아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

그러므로 우리로 사람 가운데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았다고 하였습니다(약 1:18). 이같이 하나님의 약속으로 난 자들이 바로 성경이 예언한 약속의 자녀가 될 줄로 믿습니다.

갈4:29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한 것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육체를 따라난 자(하갈의 아들)가 성령을 따라 난 자들을 핍박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다고 하였습니다.

갈4:30~31 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계집종과 그 아들을 내어 쫓으라 계집종의 아들이 자유하는 여자의 아들로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느니라 그런즉 형제들아 우리는 계집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하는 여자의 자녀니라

구약시대 때 하갈과 그 아들 이스마엘이 시내산으로 내어 쫓겨난 것과 같이 마찬가지로 마지막 때에 아들이 아니요 종의 옷을 입은 외인들이 쫓겨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종의 신앙을 벗어나지 못한 종들은 바로 쫓겨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는 종의 시대에 있는 어리석은 자들이 아니라 이제는 하나님 아들의 시대로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축복을 받아야할 줄로 믿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지 보시겠습니다.

롬8:14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기록된 말씀에서 영이란 것은 요한복음 6장 63절 말씀에 보면“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예수님이 우리들에게 일러준 그 말씀, 오늘 증거된 이 말씀이 바로 영이요 생명인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도함을 받은 자들이 약속받은 하나님의 아들이 될 줄로 믿습니다(롬8:14).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약속을 유업으로 받습니다. 종은 아무리 일을 많이 하여도 품삯을 받으면 끝이 나지만 아들의 유업을 받지 못합니다. 이제는 종에서 벗어난 신앙으로 아들의 신앙을 가진 자 되어야 합니다.

갈4:7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이을 자니라

이제 여러분들은 땅에 속한 종이 아니요, 육체로 난 자가 아니요, 위에 사는 예루살렘이 낳은(약 1:18) 하나님의 자녀, 약속받은 하나님의 아들, 딸들로 다 축복되기를 원합니다. 구약시대에는 이스라엘 민족 자체가 다 종이었습니다.

사41:8 그러나 나의 종 너 이스라엘아 나의 택한 야곱아 나의 벗 아브라함의 자손아

이스라엘이 다 종입니다.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는 다 아브라함의 자녀라고 하였습니다(갈3:29). 아브라함의 자손이 다 종입니다. 아브라함의 자손 전체가 다 종의 시대로 나온 종이었지만 이제는 하늘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있는, 드디어 이제야말로 하나님의 자녀의 시대가 온 줄로 믿습니다.

두 언약, 다시 말하면 마지막 때 다같이 예수를 믿는 자이지만 육체를 따라 난 자는 영적으로 하면 하갈로부터 나온 주의 종들이며 그리스도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자들은 위에 있는 예루살렘을 상징한 사라로부터 나온 자요 그리스도에게 속한 아들로서 구원받을 자들입니다. 이것은 종과 아들로 비유한 두 언약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아브라함 자손 중에(갈3:29) 종의 신앙을 가진 자와 아들의 신앙을 가진 자를 두 언약으로 곧 이스마엘과 이삭으로 비유했습니다.
여러분, 이삭과 같은 자녀들로서 하나님의 약속을 유업으로 받는 귀한 자들로 축복되시기를 예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