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그리스도 옷 입은 자 되라!
본문말씀 : 갈라디아서 3장 23~27절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가 율법 아래 매인 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夢學) 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몽학선생 아래 있지 아니하도다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왕이 입는 옷은 아무나 입을 수 없습니다. 만약에 왕이 입는 옷을 만들어 이조시대 때에 입었다면 당장 역적으로 몰려서 삼족이 멸함을 당할 것입니다.
우리의 입는 모든 옷의 몸단장은 그 사람의 인격의 거울입니다. 그래서 옷을 단정하게 입고 깨끗하게 입고 하는 것은 그 사람의 품격이요 인격의 거울이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좋은 직책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그 직책의 옷을 입은 사람입니다. 지도자의 직분을 가진 자는 사람을 만날 때에 말의 단정함과 정직함이 있을 때에 이 사람은 영적으로 깨끗하고 단정한 옷을 입은 사람입니다. 뿐만 아니라 육신의 옷도 단정한 복장의 옷을 입고 있어야 합니다.
매일 들에 나가서 일하는 농부는 좀 헐한 옷을 입고 있습니다. 그 옷은 농부에 맞는 훌륭한 옷의 인격이요 그 사람의 거울입니다. 직분에 따라 입는 옷은 그 사람의 인격표현입니다. 범죄한 자는 죄수복을 입고 재판관은 무게 있는 검은 두루마기 같은 법복을 입고 있습니다. 옷을 보고 저 사람은 법관이다 저 사람은 죄인이다 하는 것을 아주 쉽게 알 수가 있습니다.
군에 가면 군복이 있는데 계급에 따라서 장군의 옷과 장교의 옷과 사병의 옷이 다 다릅니다. 별이 네 개 달린 장군이 있는데 이등병이 별 네 개 달린 장군의 옷을 입고 돌아다니다 붙들리면 그 사람은 감옥에 들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옷은 자기의 격에 맞는 옷을 입을 때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을 합니다.
박대통령이 대통령 시절에 고향에 가서 벼논에 모를 심는데 많은 기자들이 동행했습니다. 대통령 옷을 입지 않고 밀짚모자 쓰고 바지를 걷어서 무릎까지 올리고 위에는 넥타이를 매지 않는 티셔츠를 입고 같이 모심기를 할 때 모습이 국민들의 보기에 농민을 위한 대통령으로 어울렸는데 대통령이라고 해서 모심는데 가서 넥타이 매고 양복 정장하고 논에 들어가면 사람들이 뭐라고 보겠습니까? 보는 이마다 한마디씩 했을 것입니다. 박대통령이 입었던 옷은 농부의 격에 맞는 옷이었기 때문에 당시 80% 농민의 지지를 얻은 대통령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성경에 ‘그리스도의 옷 입은 자 되라’ 말씀하신 것은 그리스도의 옷은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의 옷이 아닙니다.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의 옷은 피에 젖어서 찢어지고 갈겨지고 매를 맞고 흙탕물에 굴러서 고통과 고난의 흙이 묻었던 그런 옷이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지신 주님께서는 운명하신지 사흘 만에 부활하시고 많은 사람 앞에 나타났을 때에 그는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으셨고, 시공간을 초월하여 방문을 닫아 놓은 가운데서 나타나신 분으로 다시 죽을 수 없는 신령(神靈)한 몸으로 영생의 몸에 입은 거룩한 옷이었습니다. 이러한 옷이 그리스도의 옷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활하신 주님의 옷을 입으라 하셨으므로 입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갈3:27).
시공간을 초월하신 그리스도께서 방문을 닫아 놓은 가운데에 나타나신 주님의 옷과 같이, 우리 또한 부활 주님처럼 변화를 하여서(빌3:21) 시공간을 초월하는 말씀으로 거룩한 옷을 입은 자 되어(요17:17), 아주 빛나고 찬란한 그리스도와 같은 옷을 입을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17:2 저희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그리스도는 모세와 엘리야를 만난 변화산상에서 눈부시고 빛나는 옷을 입으셨습니다. 그런 옷을 입으셨기 때문에 천 오백여 년 전에 죽었던 모세를 만나서 그리스도 운명에 관한 대화를 나누었고, 천 년 전에 죽은 엘리야를 만나서 예수님의 승천과 재림하실 것에 관한 대화를 나눈 것입니다.
그러므로 빌립보서 3장 21절의 그리스도와 같이 영광의 몸의 형체로 홀연 변화 받은(고전15:51~54)자들은 수천 년 전에 죽은 영인들도 만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천년, 천오백 년이 지난 사람을 만난 그리스도의 옷이 보통 옷이었겠습니까? 그 옷은 영생의 옷으로서 빛과 같이 빛나는 찬란한 세마포 옷으로서(계19:7) 영생의 옷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종말에 입어야 될 옷은 세상에서 천으로 짜서 만든 비단 옷이 아닙니다. 감히 사람이 만질 수 없는 눈부시도록 찬란하게 빛나는 아름다운 변화체의 옷입니다(고전15:51~54).
빌3:21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
신령한 몸으로 변하신 주님(고전15:42~44) 그 인격의 몸, 신(神)의 성품에 여러분들도 참여할 수 있는(엡 4:15, 요일3:2) 존귀한 몸이 되기를 원합니다.
옛날 조상들이 과거급제함으로 입었던 옷도 세상 사람들이 입은 옷과 같은 일반 천으로 만든 옷이지만, 그 머리 꼭대기에 관을 쓰고 오면 온 동네 사람들이 부러워했습니다.
천은 다 같은 천이지만 농부가 입은 옷은 빛나지 아니하고 과거에 급제하여 출세하고 돌아온 사람의 옷은 인고의 고통에서 해산된 새사람으로서, 국가의 관리로서 찬란하게 빛나는 옷을 입은 자가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만약 전 세계 축구 월드컵 경기를 해서 승리의 월드컵을 가지고 돌아온다면 그 선수들이 갈 때 입었던 옷은 똑같은 옷이지만 돌아올 때는 우리 전 국민들이 보기에 찬란하게 빛나는 빛의 옷을 입은 자된 것과 같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옷 입은 자 되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옷을 입자면 어떤 옷을 입어야 하는가에 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먼저 본문 말씀을 읽으면서 증거를 합니다.
갈3:23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가 율법 아래 매인 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십계명의 율법 아래 매인 바 된 것은 성경의 입장에서 보면 아직 믿음이 오지 않은 상태입니다. 믿음이 오기 전에는 여러 가지 세상의 법과 성경의 율법에 매인 바 되었습니다. 율법에 매여 있는 자들은 장래의 일을 알게 하여 주는 미래의 계시적인 믿음이 올 때까지 율법아래 갇혔느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아래 매여 있는 사람은 믿음의 때까지 갇혀 있기 때문에 율법의 감옥 속에 갇힌 자로서 하나님의 뜻을 알 수가 없습니다.
갈3:24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蒙學) 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몽학선생이라는 것은 먼저 한자로 어린아이 몽(蒙), 배울 학(學) 자를 써서 어린아이를 가르치는 선생 곧 유치원 선생을 말합니다. 유치원 선생은 유치원생에게 필요한 것이지, 장성한 어른에게 유치원 선생이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장성한 자에게 유치원 것을 가르치면 장성한 자가 유치원 선생에 대하여 우습다고 볼 것입니다. 유치원 선생은 유치원 학생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제가 초등학교 3학년 때 운동장에서 교실로 입실할 때 학생들이 열을 지어 구구단을 외우며 구구 팔십일이 끝이 나야 의자에 앉았습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이러한 학습을 했는데, 대학교에 다니는 학생이 교실에 들어가면서 구구단을 외우며 돌아다니면 얼마나 어리석은 자요, 또한 정신 이상자로 보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들이 율법을 지켜서 의롭게 되려는 것은 유치원생들에게 교훈하는 교육과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을 지켜서 의롭게 되려고 하는 자들은 몽학선생(유치원선생)아래 있는 자들로서 율법의 멍에에서 벗어난 자들이 믿음이 온 자들이요, 몽학 선생을 벗어남으로서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고 하였습니다.
갈5:4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
예수님께 축복받은 자가 되어야 하는데 율법을 지켜서 의롭다함을 얻으려 하는 자는 그리스도로부터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라고 했습니다.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들이 율법을 지켜서 의롭게 되려고 하고 있는 현실로서 기독교인들 대부분이 몽학 선생 아래 있는 것을 개탄합니다. 이런 신비한 말씀을 우리가 깨닫고 접할 수 있었다는 것은 여러분들이 율법을 벗어났고 율법에서 해방 받은(롬7:6) 믿음 안에 있는 큰 축복을 받은바 된 자들인 줄로 믿습니다.
이와 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몽학 선생, 유치원 선생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유치원 선생이 되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은 이미 유치원 과정의 신앙을 벗어났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천 년 전에 예수님이 이 땅 위에 오셨으므로 이미 율법시대는 끝이 난 것입니다.
롬10:4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그러므로 몽학 선생의 시대 곧 율법시대는 끝이 났다는 것입니다. 몽학 선생이 끝이 났다는 것은 시대적으로 보아 유치원 선생을 따라가는 시대는 끝났다고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 기독교인뿐만 아니라, 전 세계 기독교인의 대부분이 율법을 지켜서 의롭게 되려 하고 있습니다. 이러므로 세계 기독교가 양적으로는 성장하였지만 율법의 감옥에 갇혀서 믿음을 얻지 못한 것입니다.
갈5:4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
이 말씀을 보시게 되면 무엇인가는 우리의 마음속에 지금까지 알지 못했던 새로운 혁명의 말씀이 오늘 여러분의 귓전을 두드리고 우리의 마음을 두드리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갈3:25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몽학선생 아래 있지 아니하도다
믿음이 온 후로는 몽학선생(율법선생) 아래 있지 아니하도다 라고 하였습니다. 이러므로 현재 율법 아래 몽학선생 아래 있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는 곧 믿는 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신앙의 유치원 선생은 어떤 선생인가 하면 바로 율법 선생입니다.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 선생이 되어” 라고 하지 않았습니까?(갈3:24) 그러나 오늘날 율법을 지켜서 의롭게 되고자 하는 것이 기독교인들의 보편적인 신앙입니다. 거의 다 그렇다고 볼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현실을 알고도 잠잠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의 대부분이 율법에 얽매여 있다고 해도 우리가 성경적으로 볼 때는 크게 틀린 말이 아닙니다.
이제 우리는 율법에서 벗어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로 축복을 받아야 될 줄로 믿습니다.
롬7:6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찌니라
“얽매였다는 것”은 율법에 의해서 꼭 조임을 받아 보이지 않는 줄에 묶여서 율법대로 살려고 몸부림쳤다는 것입니다. “율법에서 벗어났으니”는 엄청난 이야기입니다. 기독교인들 중에서 율법에서 벗어난 자들이 몇 명이나 되며 율법에서 해방 받은 자들이 얼마나 되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이 율법을 지켜서, 율법에 매여서 의롭게 되려고 하는 것이 오늘날의 현실입니다. 이에 모세의 십계명을 묵은 글, 이미 지나간 법이라고 하여 의문의 율법이라고 합니다.
의문(儀文)이라고 하는 것은 해묵은 율법, 이미 폐기된 율법인 것입니다. 이미 폐기된 법이 우리에게 명령할 수가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율법에서 빠져나와서 율법에서 속량함을 받은 자들이 믿음을 가진 자들입니다(갈 3:25).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은 우리를 율법에서 구원하기 위함이요 율법은 저주의 법입니다. 그러므로 모세의 율법을 받은 자들은 광야에서 다 저주 받았습니다.
갈3: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율법에서 구원하시려고 저주의 십자가에 달려서 저주를 받았다고 하였습니다. 율법에서 하루속히 빠져나와야 율법의 신앙으로 인도하는 거짓 목자로부터 해방 받는 것이 저주에서 빠져 나온다는 것을 깨닫기를 원합니다.
이것은 엄청난 하나님의 약속을 주신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이런 말씀을 들었다면 얼마나 후회되고 놀라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율법에서 벗어 나와야 저주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무에 달려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았음으로 우리가 율법의 저주에서 구속받고 구원받은 것인 줄로 믿습니다.
갈3:25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몽학선생 아래 있지 아니하도다
“믿음이 온 후로는 율법아래 있지 아니하도다.” 라는 말씀을 마음속 깊이 새겨야 합니다. 율법을 지켜서 의롭게 되려고 하는 것은 몽학 선생 아래 있는 것입니다. 즉 찬송가 뒤에 붙여놓은 십계명이 율법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미 이천년 전에 폐기된(롬10:4), 사장(死藏)된 십계명을 지키라고 찬송가 뒤에 기록하여 놓은 것입니다. 이것을 지켜서 의롭게 되려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라고 했습니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몽학 선생 아래, 유치원 선생 아래 있지 아니하도다 라고 했습니다. 몽학 선생에서 벗어나고 율법에서 벗어난 자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갈3:26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에서 벗어난 자가 믿음을 가진 자입니다. 율법에서 벗어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는 말과 동일합니다. 율법에서 벗어난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율법에서 벗어나지 않은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율법의 법에 묶여서 종살이 밖에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만약 율법을 지켜서 의롭게 될 수 있다면 예수 믿지 않아도 구원받을 것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말씀의 종, 은사의 종, 권능의 종, 신유의 종, 모두 종입니다. 보이지 않는 율법 줄에 주의 종들이 꽁꽁 묶여서 생활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밥을 하다가 칼에 손가락을 다치면 “새벽기도를 가지 않았더니 손가락이 다쳤구나.” 또는 “내가 이달에 십일조 생활을 안 했더니 십일조 몇 배나 날라가 버렸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두려움과 저주의 신이 아닙니다. 개인이나 가정의 불행한 일의 전체가 율법을 지키지 아니함으로 온 벌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런 자들은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없는 종의 영을 받은 자들입니다(롬8:15).
종은 율법에 매여 있습니다. 남의 집에서 일하는 종은 몇 시부터 출근해서 몇 시에 퇴근하라는 시간이 정해져 있는 것입니다. 그 안에서 임의로 주인 허락 없이 나갈 수가 없습니다. 보이지 않는 율법 줄에 묶여있는 종들인 것입니다.
그러나 아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아들은 일하다가도 나가고 싶으면 나가고 들어오고 싶으면 들어오고 하룻밤 놀고 싶으면 놀다가 와도 집주인은 아들은 쫓아내지 않습니다. 만약에 일하는 종이 열심히 일하다가 말도 없이 슬쩍 나가서 주인도 모르게 2~3일 놀다가 왔다면 당장 쫓겨납니다.
그래서 성경은 뭐라고 말을 했는가 하면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리라.” 고 하였습니다(요8:35).
갈3:26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이제 여러분들은 율법을 벗어나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다 아들이 된 줄로 믿습니다. 아들이 되었다는 것은 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갈4:7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이을 자니라
기록된 말씀과 같이 종의 멍에를 벗어난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을 때에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받게 될 줄로 믿습니다. 종은 아무리 일해도 품삯은 받을 수 있으나 유업은 받을 수가 없습니다. 아들은 놀고, 먹고, 돈을 쓰고 돌아다녀도 유업을 받습니다.
롬8:15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우리는 다 아무것도 모르는 율법의 종이었습니다. 종은 잘못하면 쫓아내니까(요8:35) 주인이 무섭습니다. 그러나 종이 양자의 영을 받아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고 했습니다(롬8:15). 양자의 영이 무엇인가 하면 원래 아들의 영을 가리켜서 양자의 영이라고 합니다.
갈4:6 너희가 아들인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종으로 있던 자가 하나님의 아들의 말씀을 받을 때 아들의 영을 받아서 양자된 것이나 종으로 있다가 아들의 영을 받아서 양자된 것이나 같은 뜻입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이제 종의 신앙을 벗어나서 아들의 신앙으로 우뚝 세움을 입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왜냐하면 종말에는 아들만이 구원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13:37 대답하여 가라사대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인자요
종말에는 천국의 아들들이 출현할 때인 줄로 믿습니다.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이요 여러분이 천국의 아들들로서 축복되기를 원합니다.
천국의 아들이 되자면 율법에서 벗어나서 종의 멍에를 벗어난 자들이라는 것을 깨닫기를 원합니다.
갈3:27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입었느니라
롬6:3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이것은 전 세계를 놀라게 하는 신비한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아서 그리스도의 옷을 입은 자라고 하였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세례를 누구와 받았는지 물어보면 김 집사하고 지금 목회하고 있는 김 목사하고 아무개 장로하고 청년시절에 같이 세례 받았는데, 한 사람은 집사 되고 한 사람은 목사 되고 한 사람은 장로 됐다고 합니다. 이왕이면 장로로 있는 대통령하고 같이 받았다고 하면 좀 더 인격이 나는 것과 같이 이보다 더 좋으려면 나는 예수님하고 세례를 같이 받았다고 하면 얼마나 더 자랑스럽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세례 받았다는 것은 엄청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이 세례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려고 줄을 서 있으니 세례 요한이 말하기를 “어떻게 당신이 나에게 세례를 받으러 오시나이까? 내가 당신한테 세례를 받아야 되는데 어떻게 당신께 세례를 줄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말하자 “아니다, 허락하라. 이같이 하여 모두 선을 이루는 것이 하나님 앞에 합당하니라 나에게 세례를 베풀라”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구약의 마지막 종으로 온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려고 하신 것입니다. 정말로 위대하신 분입니다.
“세례를 주라, 그렇지 아니하면 나와 아무 상관이 없느니라. 너와 내가 합당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자” 라고 하시고 예수님이 물속에 들어갔다가 물위로 올라오실 때에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그를 믿어라.” 하는 하늘의 메시지를 세례 요한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예수님은 세례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시고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증거 하기 시작했습니다.
요1:33~34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주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이인줄 알라 하셨기에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였노라 하니라
세례 요한은 이렇게 큰 기사와 이적과 표적을 보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 하였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서 세례를 받았는데 예수님이 또 세례를 받았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두 번째 받은 세례는 무엇인지 보겠습니다.
눅12:49~50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 이루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라고 하였고, 그(세례)를 이루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고 하였습니다. 이는 그리스도에 대한 불이 붙지 않았다고 고백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하시기를 이때는 그리스도께서 세례 요한으로부터 물세례를 이미 받고 난 뒤 인데, 왜 이런 말씀을 했는가 하면 예수님이 세례를 받고, 병을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고, 소경의 눈을 뜨게 하고, 귀머거리의 귀가 열리게 하는 기사이적을 행했으면,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신앙의 불이 마음속에 훨훨 타는 불이 붙어서 예수님을 따라야 하는데 불이 붙지를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제자들의 가슴에 마음의 불을 붙이기 위하여 다시 세례를 받아야 하였습니다. ‘나는 나의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 이루기까지(불을 붙이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날 예수님이 두 번째 세례 받은 것을 증거한 자도 없었고, 또 두 번째 세례 받았다고 말한 자도 없었지만, 성경에는 예수님이 두 번째 세례를 받은 것이 확인됩니다.
롬6:3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예수님과 합하여 세례 받은 우리라는 무리가 예수님과 함께 세례를 받은 실상을 알게 될 줄로 믿습니다. 자기 자신이 예수님과 함께 세례 받았다는 사실은 기성교인들이 모르고 있는 상태입니다. 예수와 함께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면 오늘날 기독교인이 세례의식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 세례는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피의 세례를 말합니다.
창세기 9장 4~5절 말씀에 피는 곧 생명이라고 했으므로 생명의 세례를 말합니다. 세례(洗禮)라는 뜻은 죄를 씻는 의식입니다.
오늘날까지 예수님을 믿는 자들이 요한의 세례를 받고 있습니다. 요한의 세례는 회개(悔改)하게 하는 세례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의 세례는 죄를 씻게 하여 주는 세례로써 예수님과 함께 세례를 받았다고 하였습니다(롬6:3).
예수님과 함께 세례 받은 자들은 물세례를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만 인류의 죄를 씻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세례를 받은 자들로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예수님과 함께 부활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갈3:27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입었느니라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 받았다고 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와 함께 세례받은 자들이 그리스도의 옷을 입은 자들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의 옷은, 변화산상에서 그리스도가 입었던 그 옷은 얼굴이 해와 같이 빛나고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습니다. 그리스도의 옷은 신령한 옷이요 영생의 옷이었습니다. 예수와 함께 세례를 받은 자들은 또한 그리스도의 옷을 입은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는 시공간을 초월한 자 되셔서 방문 닫아 놓은 가운데서 나타나셨습니다. 우리 또한 마지막 날 그리스도와 함께 세례받은 자들로, 변화받은 자들로서(빌3:21) 시공간을 초월한 그런 옷을 입게 될 것입니다. 예수와 합하여 세례 받은 자만이 시공간을 초월하는 그리스도의 옷을 입을 줄로 믿습니다.
오늘날 예수님과 합하여 세례 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오늘 이 말씀을 듣고 깨달은 자들만이 알 줄로 믿습니다. 예수와 함께 세례 받았다면 다른 세례 받을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요한의 물세례 신앙에서 벗어나서 예수의 부활세례를 받기를 원합니다. 예수와 합하여 이천 년 전에 우리 조상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롬6:6) 그리스도의 옷 입은 자 되시기를 원합니다.
빌3:21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
예수님과 함께 세례를 받은 우리는 주님이 오시는 그날, 주의 날에 그리스도 영광의 몸의 형체 곧 예수님의 부활체, 신령체의 몸으로 영생의 몸으로 변화를 받을 것입니다.
고전15:42~44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
기록된 말씀은 신령한 몸이 된 예수님 부활체의 몸 곧 썩지 않고 죽지 않을 몸을 말합니다. 사람이 죽으면 육체의 몸은 썩을 수밖에 없는데, 예수님은 썩지 아니할 몸으로 죽지 아니할 신령한 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약한 몸으로 심어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으나 다시는 죽을 수 없는 강한 몸으로 다시 사신 줄로 믿습니다.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시공간을 초월하여 방문 닫아 놓은 가운데 나타날 수 있었고 엠마오로 가는 두 청년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을 때에 떡 조각을 떼어 주면서 “먹어라” 하니까 떡 조각을 받을 때 영안이 활짝 열려 “주님!” 하니까, 순식간에 예수님은 보이지 아니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부활하신 변화체의 옷을 입으신 4차원 세계의 사람이라서 보이지 않습니다. 4차원의 세계에 있다가 3차원의 세계에 오면 사람이 보이지만 4차원의 세계로 떠나버리면 사람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갈3:27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입었느니라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 받은 자들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실 그때에 이미 여러분들은 예수님과 함께 세례 받음인 줄로 믿습니다.
오늘날 우리 사람의 육체는 대부분이 백세를 살지 못하고 죽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새 생명을 가진 자들은 백세를 사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살 수 있는 신령한 몸으로서 예수님의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옷을 입는다고 하였습니다(갈3:27).
롬6:4~5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새 생명이란 지금 이런 생명이 아닌 새로운 생명, 영생의 생명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거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체와 같이 우리의 죽을 몸이 썩지 않고 죽지 않을 영생의 몸으로 홀연 변화를 받으므로, 육체는 변화 받고 우리의 영은 부활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세례 받은 자들로서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와 같은 영생의 옷을 입은 자들로 나타나시기를 예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