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승의 표’ 외치는 어르신들
어르신들의 외침
오전 10시 30분 즈음이었다. 아직 이른 아침의 차가운 기운이 채 가시지 않은 상태였다. 종각역 버스정류장 의자에서 한 노인이 전도준비를 하고 있었다. 간이 스피커와 마이크를 착용하고 있었다. 가방 뒤에는 세로로 된 현수막이 알루미늄 틀에 고정되어 있었다.
노란 바탕의 현수막에는 빨간 십자가를 기준으로 “짐승의 수 666표 받으면 지옥”이라는 문구가 상단에 쓰여 있었다. 십자가 주위에는 “예수천국 불신지옥” 문구가 영어, 일어, 중국어로 함께 번역되어 있었다.
한 어르신이 때마침 “할렐루야!” 인사하며 준비하는 노인을 향해 다가왔다. 검은 봉지 안에 담긴 배추를 하나 챙겨주며 그 노인에게 주었다. 작은 선물인 듯 했다. 그리고 가방에 현수막을 달기 시작했다. 함께 전도하는 노인이었다.
사진을 찍어도 되느냐며 다가가자 흔쾌이 승낙했다. 도리어 “인터넷에 많이 배포해달라”고 했다. 자연스럽게 어느 단체에서 하는 것이냐고 물었다. 노인은 “단체가 아니라 혼자 하는 것이다”고 답했다. 후에 온 노인과 함께 하는 듯 했다. 한 분은 ‘여의도순복음교회’를 다닌다고 했다. 또 한분은 “장로교 ‘합동’측 교회에 다닌다”며 “교회에서 시키는 것도 아니며 자원해서 하고 있는 것”이라고 했다.
이 노인들은 현수막을 단 가방을 맨 채로 인사동거리 및 종각역 일대를 활보하며 짐승의 표를 받지 말라고 외친다. 번역한 외국어로도 외친다.
“짐승의 표”는 형태를 갖춘 것!?
어떤 믿음이 이 노인분들을 사로잡았는지는 의아했다. 다니는 교회 목사님들도 모두 그렇게 가르치지는 않는다고 했다. 하지만 “성경에 있다”며 계13장의 13절부터 18절까지 읽기를 필자에게 권했다. 아마 성경을 본 것과 누군가에게 들은 말들을 통해 확신하게 된 듯 보였다.
필자는 해당 말씀 중 18절 말씀을 읽으며 육백육십륙이 사람의 숫자는 아닌지 여부를 묻자 노인은 아니라고 답했다. “666표는 바코드나 칩의 형태이기에 손이나 이마에 표를 받을 수 있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계14장에 있는 십사만사천의 이마에 어린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은 혹시 무어냐고 물었다. 그것도 어떤 형태가 있는 것은 아닌지 묻자 “하나님이 인을 치시는 것은 우리의 신앙과 예수님을 믿는 구원에 해당 된다”고 했다. 반대로 “짐승의 표는 형태가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또 계19장 20절에 짐승의 표를 받던 자들이 지옥으로 들어간다며 경고했다.
일흔은 되보이는 듯한 어르신들이 건강을 유지하며 성경을 위해 전도하시는 것은 대단해 보였다. 하지만 진리라는 것은 아쉽게도 하나다. 노력과 수고가 있을지라도 하나님 뜻에 합하지 않으면 무효일 수 있는 것이다. (사16:12, 마7:21)
짐승의 표가 형태가 있는 것이라면 성경 속에 있는 표에 대해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일례로 창세기 때 가인은 표를 받았다. 하나님이 주신 표를 인해서 가인은 타인을 인한 죽임을 면케 되었다(창4:15). 단편적으로 성경에 나온 표가 형태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이렇게 자문해봐야 한다. 과연 가인이 받은 표도 형태가 있는 것이었을까?
교계 안에서 짐승의 표를 두고 논란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바코드라, 마이크로칩이라, 크레딧카드라 말하는 사람들이 비단 이 노인들만은 아니다. 짐승의 표에 대해 인터넷에 검색만 해 보아도 대다수의 글들이 ‘베리칩’ 이라고 주장한다. 또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한다.
사람의 수 육백육십륙
간략히 짐승이 무엇인지를 성경을 통해 찾아보자. 성경은 사람을 짐승으로 비유했다. 사56:11에는 개들은 몰각한 목자들이라 했다. 딛1:12에는 그레데인들을 악한 짐승이라 했다. 유1:10에서도 사람을 짐승으로 비유했다. 이와 같이, 짐승으로 비유한 사람의 수를 세어보라는 것이 계13:18의 말씀이다. “지혜가 여기 있으니 총명 있는 자는 그 짐승의 수를 세어 보라 그 수는 사람의 수니 육백육십륙이니라” 성경이 짐승의 수를 세어보라 하였다. 심지어 “그 짐승의 수는 사람의 수니”라고 하였다. 짐승의 수 곧 사람의 수. 그것을 셈해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
하나
둘
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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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백육십륙
설마 할 수 있겠지만 이 뜻이다. 그 사람의 숫자를 헤아려 보니 육백육십륙명임을 고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간단 명료하다. “지혜가 여기 있으니 총명 있는 자는 그 짐승의 수를 세어보라…” 라고 하였다. 성경은 그 수를 세어볼 수 있는 자가 지혜자요, 총명있는 자라고 말씀하고 있다.
육백육십륙 숫자는 칩의 이름이나 상징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짐승같은 사람의 수다.
인을 맞는 것도 표시다. 인(印)은 도장이라는 뜻인데 계시록에 인을 맞는 의미는 도장을 찍어 표시한다는 의미다.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께 인을 맞고 짐승에게 속한 자는 짐승의 표를 받는 것이다. 계14:1에는 “십사만사천의 이마에 어린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다”고 하였다. 이는 하나님께 속하였기 때문이다. 형태가 있는 물체이기 때문이 아니라 ‘요이1:9’ 말씀처럼 “그리스도의 교훈 안에 거하는 사람”을 말한 것이다. 그들이 아버지와 아들을 모신 자이며 이마에 어린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이 쓰인 자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