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천지 엉터리 사건의 진상
* 계시록 2~3장 편지 사건의 진상
편지는 대부분 홍종효가 주도해서 썼고 이만희씨는 홍종효씨로부터 “당신도 한 장 써 봐라!”고 핀잔을 받고 한 두 장 쓴 것이 전부이다. 편지의 내용은 계시록 2장~3장의 내용과는 전혀 다른 유재열씨의 사적인 문제를 담고 있었고 그것이 허위 사실로 판명되어 허위 사실 유포와 명예 훼손으로 이만희 홍종효는 실형을 선고 받았다.
상식적으로 계시록 2장과 3장의 내용대로 편지했다면 종교적 비판의 자유가 폭넓게 보장된 우리나라의 현행법상으로는 처벌을 받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만희씨와 홍종효가 처벌받게 된 것은 성경과 무관하게 허위사실로 개인을 비방하여 명예훼손으로 실형을 살게 된 것이다.
계시록의 7별이라는 장막성전의 7사자에게 계2, 3장의 기록대로 편지를 보냈다고 하지만 유재열 외에 누가 편지를 받은 사실이 없다. 편지의 발신자가 수신자를 몰라 7별의 실상에 유인구(유재열 부친)가 들어갔다. 신종환이 들어갔다 오락가락한다.
*향적산(계룡산) 국사봉 40일 입산 사건의 진상
이만희씨와 홍종효는 1980년 10월 27일 명동 스카라극장 옆 별다방에서 체포되어 태능경찰서로 압송되었고 구치소에 구금되었다가 98일 만인 1981년 2월 2일에 출소된다. 삼청교육대니 갖은 고초 고생이니 운운하는 것은 거짓이며 당시 50대는 심한 일에서도 제외되었다.
선고유예기간 3년이 끝나는 1983년 말부터 84년 초까지 홍종효는 죽기를 각오하고 다시 유재열을 비롯해 장막성전과 국내외 많은 교회 주소록을 입수하여 약 만 통에 가까운 편지를 등기로 보낸다. 이러할 즈음에 이긴 자는 종적을 감추었고 이에 화가 난 홍종효가 수소문 끝에 국사봉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국사봉으로 찾아가서 확인한 결과 신상훈(종교세계관심사를 만든 인물, 이만희씨가 계시록 6장 청황색 말의 실상이라고 하는 자)과 함께 차*녀 할머니 처소에 있는 이만희를 보고 분통을 터트렸다고 한다.
알고 보니 홍종효가 편지를 다시 보내기 시작하자 또다시 구속될 것이 두려워 국사봉으로 피신하였다는 얘기도 있다.
후에 이 기간에 계시를 받고 책 두 권을 기록해서 내려왔다고 거짓말을 한다.
*‘신탄’과 ‘계시록의 진상’ 에 관한 진상
통일교의 아류인 교주 진*화의 생혈교회 출신인 김건남, 김병희는 자칭 이긴 자 이만희씨로부터 장막성전을 배경으로 한 소위 실상 교리를 듣고 혹하여 통일교와 생령교회의 시대별 구원자, 노정순리, 재창조 교리 위에 자칭 이긴 자 실상 교리를 접목 사이비교 핵심 교리서를 저술한다. 즉 신천지 핵심교리 배도, 멸망, 구원자의 뿌리는 통일교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를 혼합하여 교리서인 ‘신탄’과 계시록을 자의로 해설한 해설서인 ‘계시록의 진상’을 저술하는데 ‘신탄’은 김병희, 김건남 공동저자로, ‘계시록의 진상’은 이만희 저, 대필자 김병희로 출간한다.
꿈에 부푼 이만희는 베스트셀러를 기대하며 도서출판 이만희의 종교세계관심사 이름으로 출간하여 교보문고, 종로서적 등 전국 유명서점에 보급한다. 기대와 달리 판매 저조로 정가 9천 원에서 6천 원으로 인하하여 보급하기에 이르고. 그 두 권의 책은 서울 소재 모든 대학교 도서관에 기증까지 했음에도 현재는 잘못되어 폐기 처분한 책이라고 하고 있다.
1985년 입교해서 명강사로 소문이 났던 김건남은 이만희씨를 가까이서 겪어본 지 1년여 만에 다방에서 마지막으로 이만희씨를 만나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기고 탈퇴하였다고 한다.
“내가 거지새끼에게 황족의 옷을 입혀주고 간다.”
이 후 ‘계시록의 진상’을 부분적으로 수정하고 저자를 자신으로 하여 그 책이 그 책인 여러 권의 책을 출간하여 자신의 종교사칭 다단계사의 모든 신도들이 구입하게 한다.
*1980년 3월 14일 자칭 이긴자의 창업과 ‘시한부 역사 완성 예언’ 불발 사건
백만봉의 제자로 있으면서도 평소 자칭 이긴 자가 “백만봉이 이루어도 좋고, 못 이루어도 좋다. 못 이루면 내가 이룬다.” 고 말한 것으로 볼 때 벌써부터 때를 기다렸던 것을 알 수 있는데 시한부 종말설이 불발되자 기다렸다는 듯이 3월 14일 백만봉에게서 나온 양*규, 홍*효, 김*택, 이*춘 등 10여 명이 인덕원에 있던 이만희의 집에서 첫 예배를 드리며 자신만의 사이비교를 개업하였다는 것이 이러한 사실을 확인시켜 준다. 이 날 홍종효가 대표로 기도하고 이만희씨는 계시록 1장을 설교하면서 자신을 ‘사도 요한’이라 증거하게 된다.
인덕원 이긴 자 이만희의 집, 모세 장로 신종환의 집, 동산 아파트 지하, 비산동으로 처소를 옮기면서 보좌 구성과 6일 창조 후 7일째 안식의 시한부 역사를 완성한다는 예언으로 사이비 교주의 사기 행각은 시작된다.
-이긴 자도 처음에는 첫 장막을 모방하여 7천사의 실상을 이긴 자, 홍종효, 홍*기, 이*호, 신*배, 이*선, 장*문이라 했다가 한 사람씩 이탈하면 새로운 사람으로 채워 넣는 등 애들 장난 같은 일을 하는데 12사도와 24장로도 마찬가지였다.
‘1일=1년’으로 해석하여 1981년을 창세기 1장 6일 창조의 첫째 날로 보고, 1987년 9월 14일을 일곱째 날 곧 남자(영)와 여자(육)가 하나 되는 신인합일의 영생불사가 이루어지는 날이라 하여 기대가 만발했던 때가 있었다.
드디어 그날이 되었지만 조용히 넘어갔고, 한 해가 지난 1988년 어느 날 이만희는 전도관과 장막성전을 거쳐 신천지에 와있던 오*평(별명) 권사님 등 여러 신도들을 불러 각서를 받았는데 내용을 잘 모른 채 각서에 서명했던 신도들은 그 내용이 “나는 이긴 자(이만희) 선생님이 일곱째 날인 1987년 9월 14일까지 이 역사를 다 이룬다고 말한 것을 들은 사실이 없다”라는 내용인 것을 뒤늦게 알고 분개하였다고 한다.
이 일로 그들 중 20여 명이 이탈해서 역곡에 있는 조희성의 영생교로 간 사실이 있다.
이긴 자는 ‘시한부 역사 완성 예언’의 불발을 무마시키기 위해 창세기 첫째 날의 시작이 1981년이 아니라 넷째 날에 일자와 사시와 연한이 이룬다고 했으므로 1984년으로부터 다시 날짜를 계산해야 한다는 간교한 거짓말로 슬쩍 넘어갔는데 미루어진 그날이 가까워지면서 창세기의 6일 창조 7일째 안식은 ‘1일=1년’에서 ‘1일=1천 년’으로 점차 바꿔지고, 1990년대에 무료성경신학원이 설립되면서 시한부는 유야무야되었고 그때의 경험으로 이만희씨는 절대 시한부를 정하지 않고 다만 “2~3년만 있으면” “144,000명이 차기만 하면” 등의 교활한 수법으로 신도들을 독려하고 꾀고 있다.
*재림 예수는 이제 오지 않는다. 그들은(신천지 육체영생교도들) 이렇게 믿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재림 예수님은 이미 과천에 성지를 둔 신천지증거장막성전의 이만희 교주 몸에 영으로 이미 재림하였기 때문이며, 따라서 장차 이만희교주를 통해 시온 산에 서게 되는 144,000명을 인치는 자도 이만희교주가 한다고 믿고 있으며 그가 이 세상을 심판 할 자라고 굳게 믿고 있다.
그는 만유의 대주재로 칭송 받고 있으며 또한 우리가 믿고 있는 재림 예수님 대신 이긴 자가 만국으로부터 경배를 받게 되며, 외국에서 이 교리를 배우기 위해 금은보화를 싣고 와서 갈 때는 신천지 교주 이만희의 이 말씀을 가지고 간다고 그는 말하고 있다.
이만희의 약력은 그들 신천지 증거장막성전의 공식 홈페이지에 잘 설명되어 있는데 그는 대한민국의 대표적 사이비 종교 ‘전도관’에서 10여 년이나 신앙을 했었노라고 스스로 밝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