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여인 서서평(엘리제 셰핑:1880-1834) 선교사 이야기
한 여인이 말을 타고 전라도 일대를 한 달 여간 순회한 뒤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이번에 만난 여성 500명 중 이름이 있는 사람은 열 명뿐입니다. 1921년, 조선여성들은 큰년이, 작은년이, 개똥 어멈으로 불립니다. 이들에게 이름을 지어주고 글을 가르쳐 주는 것이 저의 가장 큰 기쁨입니다.” 간호 선교사로 조선에 발을 내디딘 엘리자베스 쉐핑(1880~1934)의 기록입니다. 당시 조선의 상황은 가난은 이루 말할 수 없었고 전염병으로 병자가 넘쳐나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들에게서 눈과 마음을 뗄 수 없었떤 그녀는 서양식 삶을 고수하던 여러 선교사와 달리 조선말을 익혀 ‘서서평’이라 이름 짓고, 한복을 입고 된장국을 먹으며 헐벗은 사람들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때, 선교사에게 주어진 하루 식비는 3원, 그러나 서서평은 10전으로 허기를 채우고 나머지는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썻습니다. 걸인들을 데려와 씻기고 옷을 사 입히는 가 하면, 환자가 버린 아이를 수양아들로 삼았습니다. 그렇게 데려다 키운 아이가 14명, 아이 낳지 못해 쫓겨나거나 오갈 데 없는 여인 38명도 거두어보살폈습니다. 한번은 병원 앞에 버려진 아기를 어느 집에 맡겼는데 잘 키우겠따는 약속과 달리 술심부름을 시키는 것을 보고 그동안의 양육비를 주고 데려 오기도 했습니다. 서서평이 이일학교와 조선 간호부회(대한 간호협회전신)를 세운 것도 이들의 자립을 돕기 위해서였습니다.
조선에서 이렇게 헌신하다 휴가를 받아 잠시 미국에 가 어머니를 만났을 때 고된 생활에 찌든 딸을 보고 “몰골이 부끄러우니 돌아가라!” 하며 매몰차게 외면했습니다. 강냉이 가루 2홉, 현금7전, 반쪽짜리 담요… 서서평이 22년간의 조선 생활을 마치고풍토병과 영양실조로 세상을 떠날 때 남긴 유품의 전부였습니다.
거적떼기를 덮고 자는 사람에게 그의 담요 반쪽을 찢어주고 남은 반쪽으로 가날픈 몸을 가린 채.. 이승의 삶을 그렇게 마쳤습니다. 그의 장례 행렬을 뒤따르던 천여명은 통곡하여 한 목소리로 외쳤습니다. “어머니.. 어머니..!” 그로부터 80여년이 흐른 오늘까지도 서서평이 묻힌 광주시 양림동 뒷동산에는 그의 참사랑과 헌신을 추억하는 발걸음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1934년 6월 서서평 선교사는 광주에서 만성 풍토병과 과로, 영양실조로 숨졌습니다. 그녀가 남긴 건 담요 반 장, 동전 7전, 강냉이가루 2홉뿐이었습니다. 시신도 유언에 따라 의학 연구용으로 기증됐습니다. 찢어지게 가난한 나라 조선에서 22년간 보리밥에 된장국을 먹고 고무신을 끌고 다니며 ‘조선인의 친구’가 아니라 그저 ‘조선인’으로 살았던 사람, 가난하고 병든 이웃, 나환자들을 죽기까지 섬겼던 그 사람을 우리는 너무 쉽게 잊고 살아왔습니다…”
서서평(본명 엘리제 셰핑.1880~1934) 선교사가 기념사업 경과 보고를 하던 ‘열방을 섬기는 사람들’ 양국주(63) 대표가 울먹였다. 3월 17일 오후 광주광역시 양림동 기독간호대학 안 오웬기념각. ‘서서평 선교사 내한 100주년 기념 예배 및 평전 출판 기념회’에 모인 1000여명이 여기저기서 함께 눈가를 훔쳤다. 독일 출신의 미국인 서서평은 1912년 32살의 나이에 처음 조선에 온 독신여성 간호 선교사. 끊임없이 병고에 시달리는 몸을 이끌고 광주 제우원 등을 중심으로 전라도 일대와 제주도를 순회하며 병자를 돌보고 가난한 여인들을 가르쳤다.
서서평이 바라본 조선 땅은 고난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한 번 순회 진료 여행을 나서면 말을 타고 한 달 이상 270km 넘는 거리를 이동했다. 진흙탕에 말이 쓰러지면 짐을 머리에 이고 걸어야 했다. :이번 여행에서 만난 여성 500명 중 이름이 있는 사람은 열명분입니다. 조선 여성들은 ‘돼지할머니’ ‘큰년’ ‘적은년’으로 불립니다. 이들에게 이름을 지어주고 한글을 깨우쳐주는 것이 제 가장 큰 기쁨 중 하나입니다.”(1921년 내수빌 선교부에 보낸 편지) 서서평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 한국 최초의 여성 신학교인 이일학교(션 한일장신대의 전신)를 세워 여성들을 가르쳤다. 조선간호부협회(현 간호협회의 전신)를 세우고 일본과 별도로 세계 간호사협회에 등록하려 애썼던 이도 서서평이다. 출애굽기를 가르치며 독립의 확신을 심어주려 애썼다.
1929년 안식년을 맞아 갔던 미국에서 서서평은 1살 때 자신을 할머니에게 맡기고 떠났던 어머니를 만난다. 하지만 어머니는 고된 선교사 생활로 가난이 몸에 밴 딸을 “니 몰골이 부끄러우니 썩 꺼지라”고 내친다. 평생 어머니의 사랑에 굶주렸으면서도 서서평은 수양딸 13명과 나환자의 아들 1명 등 한국 아이 14명을 입양해 훌륭하게 키워냈다. 과부 38명이 자립해 새 삶을 살도록 도운 것도 서서평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 이었다.
조선일보 2012년 3월 19일 월요일 52판 A23면에 실린 문화판에서 그대로 옮김